4.5번 레인
나는 한나래초등학교 6학년 수영 선수, 정하늘이다.
엄마와 아빠 역시 같은 초등학교 수영부 출신이다. 두 분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수영을 그만두었고,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로, 아빠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박사로 일하고 계신다.
내가 물속으로 들어간 것도 결국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들려주는 수영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고 자랐고, 자연스럽게 물과 친해졌다. 물살을 가르는 느낌이 좋아 계속 헤엄치다 보니, 어느새 스타트대에 올라 0.01초를 다투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레인 위에서 0.01초를 줄이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의 중요한 대회가 끝났다.
아무리 바빠도 대회가 끝난 날 밤만큼은 우리 가족만의 식탁이 차려진다.
한 달 전, 아빠의 연구팀이 국가 핵심 AI 과제를 맡으면서 해외 출장은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로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비행기 연착으로 아빠는 참석하지 못했고, 엄마와 나 둘이서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현관 앞에 큰 캐리어를 세워 둔 채 도어록을 누르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남아 있었다. 눈 밑이 푹 꺼져 있었고, 어깨도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마음도 툭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아빠는 두 눈을 반짝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캐리어 뒤에 숨겨 두었던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꺼내 들며 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저녁 약속은 놓쳤지만,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서 곧장 달려온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빠의 품으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아빠의 셔츠에서는 익숙한 체취 사이로 처음 맡아 보는 이국의 냄새와 달콤한 꽃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풍겨왔다.
식탁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차와 과일, 낯선 언어가 적힌 과자와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엄마는 작은 조각 케이크를 내 앞에 놓으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이번 대회 고생 많았어.”
“엄마도 고마워. 경기장에서 이것저것 챙겨줘서. 엄마 없었으면 나 진짜 정신없었을 거야.”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아빠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하늘아, 접영 100에 200까지 싹 쓸었다며…… 역시 우리 딸 대단하다. 직접 가서 목터져라 응원해 주고, 꼭 같이 저녁 먹으면서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진짜 미안하다.”
“에이, 괜찮아. 아빠 엄청 바쁜 일 하는 거 다 아는데,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케이크 크림을 포크로 콕 찍어 먹었다.
옆에 앉은 엄마가 머쓱해하는 아빠를 힐끗 보곤 장난스럽게 거들었다.
“말도 마. 네 아빠는 경기장 못 간 게 한이 됐는지, 연구실에서 네 경기 영상만 수십 번은 돌려봤대.”
“진짜?”
나는 아빠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아빠 최고! 영상으로 봤어도 전광판 제일 위에 내 이름 딱 뜬 거 보고 소름 돋았지?"
“그럼, 당연하지.”
아빠가 괜히 가슴을 툭 치며 어깨를 펴 보였다.
“아, 그리고 아빠가 사준 신상 수영복 있잖아.”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그거 진짜 대박이야. 물속에서 치고 나가는 느낌부터가 완전히 다르다니까?”
아빠는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 봐, 내가 뭐랬냐! 너 막판에 턴하고 스트로크 바꿀 때 팔 각도가 아주, 어? 딱 이랬다니까!”
아빠가 식탁 위로 상체를 바짝 들이밀며 허공에 양팔을 휘저었다. 그러다 휘두르던 손끝이 찻잔 테두리를 툭 건드렸다.
찰랑.
찻물이 넘치기 직전, 엄마가 얼른 손을 뻗어 잔을 붙잡았다.
“조심 좀 해! 식탁에서 접영을 하면 어떡해? 초등학생 때나 그렇게 열심히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지금쯤 집에 메달이 궤짝으로 쌓였겠네.”
엄마가 눈총을 주자 아빠는 팔을 슬그머니 내리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더니 엄마 몰래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입안에 있던 케이크를 뿜을 뻔했다. 급하게 입을 가리고 쿨럭거리자, 엄마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천천히 먹어.”
엄마는 내 뺨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살짝 닦아내고는, 그대로 팔을 뻗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수영복도 수영복이지만, 우리 하늘이가 매일 새벽부터 물속에서 얼마나 피땀 흘렸는지 우리 다 알지. 요새 엄마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해서 늘 미안했어.”
엄마의 품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엄마 무슨 소리야. 집에 오면 엄마가 이렇게 꼭 안아주는 게 나한테는 제일 큰 힘인데.”
엄마가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면서 말없이 웃었다.
나는 엄마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엄마 냄새가 코끝에 닿자, 하루 종일 맡았던 독한 소독약 냄새와 쌓였던 피로가 어느새 멀게 느껴졌다.
“우리 딸, 다 키웠네.”
엄마는 천천히 품을 풀고 내 눈을 바라봤다.
“아참, 하늘아. 소파 위에 엄마 가방 있지? 거기서 책 한 권만 꺼내다 줄래?”
“응, 알았어.”
나는 식탁 의자를 밀고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엄마의 숄더백을 열어 손을 넣고 책을 꺼내려던 순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건넸다.
“『5번 레인』이네?”
엄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글 웃었다.
“이거 읽어 봤어?”
“당연히 읽어 봤지. 그런데 표지가 바뀐 것 같아.”
나는 새 표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수영책인데 왜 횡단보도야?”
“글쎄, 이번 표지는 수영보다 아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 주고 싶었나 봐.”
나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나는 예전 표지가 더 좋았는데.”
“왜?”
“『5번 레인』이면 수영 이야기잖아. 수영하는 아이가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려.”
“그래? 역시 수영 선수답네. 그럼 엄마가 퀴즈 하나 낼까?”
엄마가 손에 든 책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저께 말이야, 엄마 학교에 누가 왔∼게?”
“음…… 엄마가 맨날 말하는 그 블랙홀?”
“땡! 힌트 줄까?”
엄마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손에 들린 책으로 눈을 돌렸다.
“수영 선수 아니면…… 설마 진짜 작가님?”
“딩동댕.”
나는 상체를 식탁 앞으로 바짝 기울였다.
“와, 진짜 은소홀 작가님이라고?”
“응. 아이들이랑 같이 강연도 듣고, 끝나고 사인도 받았지.”
엄마가 내밀어 준 책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겼다. 면지에는 인쇄된 작가님의 사인 위로, 검은색 네임펜으로 꾹꾹 눌러쓴 친필 문구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정하늘 선수의 멋진 수영과 꿈을 응원합니다!’
“우와…….”
나는 눈을 반짝이며 사인을 한참 들여다봤다.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가 오밀조밀하게 겹친 독특한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초코송이 같기도 하고, 수영장 탈의실 옷걸이에 걸린 수건 같기도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작가님이 엄마 학교에 오셨다니 신기했다.
“엄마, 작가님이 무슨 얘기 하셨어?”
“아이들이 궁금한 것들에 답도 해주시고, 다 같이 재미있는 퀴즈도 풀었지.”
나는 손끝으로 책 표지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손끝이 멈췄다.
“엄마.”
“응?”
“나 이 책 읽으면서 이상하다 싶은 게 있었어.”
엄마가 흥미롭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뭔데?”
나는 옆에 두었던 태블릿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아론한테 물어봤거든.”
화면 중앙에서 아론의 푸른빛 아이콘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책 읽다가 조금 의아한 부분이 나오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확인해 달라고 했지.”
엄마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아론한테? 책 분석을 시켰단 말이야?”
“응. 아빠 연구실에서 제일 똑똑한 애잖아.”
과일에 포크를 꽂던 아빠가 손을 멈췄다.
“크흠. 하늘아, 그건 잘못된 정보란다.”
“뭐가?”
아빠는 포크를 접시 가장자리에 올려두고,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
“당연히 연구실에서는 이 아빠가 제일 똑똑하지.”
“그래, 하늘아. 아빠 서운하겠다. 똑똑한 아론을 만드느라 아빠 머리숱이 희생된 사실은 인정해 주자.”
“여보, 희생이 아니라 명예로운 훈장이라고 해주겠어?”
아빠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억울한 표정을 짓자, 나와 엄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빠의 훤해진 정수리가 조금 짠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참 아빠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태블릿 화면을 터치했다.
“그럼, 첫 번째 문제 들어갑니다!”
내가 퀴즈 출제자라도 된 듯 손가락을 번쩍 들어 올리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쪽을 가리켰다.
“잠깐만. 식탁에서 태블릿 하나로 셋이 보면 답답하잖아. 거실 가서 스크린으로 크게 보자.”
엄마와 나는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엄마는 들고 온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재미있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아빠가 거실 중앙에 서서 손가락을 튕겼다.
“아론, 스크린 내려서 하늘이 태블릿이랑 연결해 줘.”
천장에서 전동 스크린이 스르륵 내려오고, 거실 조명이 은은하게 낮아졌다. 대형 스크린 중앙에 아론을 상징하는 푸른빛 아이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태블릿을 손에 꼭 쥐었다.
“아론, 시작하자!”
부드럽고 차분한 아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분석 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은소홀 작가의 『5번 레인』은 인물들의 마음과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 낸 작품입니다. 다만 실제 대회 기록을 비롯해 작품 속 여러 설정과 연출을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태블릿 펜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아론, 첫 번째 자료 화면 띄워 줘!”
거실 스크린에 첫 장면이 큼직하게 떠올랐다. 나는 기록이 나온 부분을 확대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전국소년체전 자유형 50미터에서 초희가 26초 75로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고 나오잖아. 그런데 아론이 실제 경기 기록을 찾아봤는데, 이미 2016년에 26초 51을 기록한 초등학생 선수가 있었어.”
나는 태블릿을 다시 터치했다.
“아론, 관련 기사 띄워 줘!”
스크린 오른쪽으로 《어린이조선일보》 기사 캡처 화면이 떠올랐다. 2016년에 작성된 기사에는 당시 초등학생 선수의 소년체전 수영 4관왕이라는 타이틀 아래 자유형과 접영 50m에서 신기록을 달성한 소식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빠가 스크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이 선수 잘 알지. 중학생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돼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선수야. 그런데 고등학교 때 수영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택했지.”
엄마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어머, 그래? 아론, 그럼 그 기록이 아직도 안 깨진 거야? 그 선수는 수영 그만두고 지금 뭐 한대?”
— “2016년에 수립된 26초 51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소년체전 여초부 자유형 50m 대회 신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해당 선수는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현재 4학년 생도로 재학 중입니다.”
아론의 설명과 함께 스크린 한쪽에 관련 근황 기사가 떠올랐다.
“세상에, 10년 동안이나 안 깨진 기록이라니 대단하네. 저런 선수가 수영을 그만두고 공군사관학교에 갔다니, 정말 보기 드문 경우네.”
“맞아! 바로 그거야!”
나는 펜으로 스크린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에 이미 26초 51이라는 무시무시한 신기록이 나왔잖아. 그런데 2019년이 배경인 소설에서 초희가 26초 75로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오류지! 26초 51보다 느린데 어떻게 신기록이 돼?”
엄마가 내 말을 듣고는 물었다.
“하늘아, 그런데 책에 2019년이라는 연도가 직접 나와?”
나는 곧바로 태블릿 화면을 넘겨 8장의 본문을 띄웠다.
“직접 나오진 않아. 하지만 공원에서 태양이가 그러잖아.”
내가 그 문장을 터치하자, 스크린에 ‘달에 사람이 처음 간 게 50년 전이래’라는 대사가 크게 확대됐다.
“사람이 처음 달에 발을 디딘 게 1969년이니까, 거기서 50년 뒤면 딱 2019년이잖아!”
아빠가 무릎을 찰싹 쳤다.
“오, 우리 정하늘 탐정 다 됐는데?”
나는 괜히 가슴을 쭉 펴고 우쭐했다.
엄마가 내 볼을 꼬집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딸, 관찰력은 정말 날카롭네. 하지만 그 대사 하나만으로 소설의 배경을 2019년이라고 단정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왜?”
“태양이가 ‘50년 전’이라고 말할 때 꼭 숫자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말한 건 아니잖아. 그냥 ‘아주 오래전’이라는 뜻으로 대충 말했을 수도 있고.”
“엄마, 태양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야. 게다가 2학년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잖아. 강아지 이름도 ‘라이카’라고 지을 만큼 우주에 관심이 많은 애고. 그런 애가 달 착륙 연도도 모르고 ‘50년 전’이라고 대충 말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바로 뒤에도 단서가 하나 더 나와. 이것 봐.”
나는 태블릿 펜으로 다음 문장을 터치했다.
스크린에 ‘나루가 살아온 날들의 네 배쯤 되는 시간이 흘렀다’라는 문장이 크게 확대됐다.
“나루가 열세 살이니까 네 배면 약 52년이지. 태양이가 말한 ‘50년 전’이랑 거의 맞아떨어지지 않아?”
나는 숨을 고른 뒤, 엄마와 아빠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단서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이어서 나왔잖아. 그냥 ‘엄청 옛날’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보기엔 좀 어렵지 않아?”
엄마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그렇게 연결해서 볼 수도 있겠다.”
“그렇죠?”
내 목소리에 한층 자신감이 실렸다.
“응. 하지만 설령 배경이 2019년이 맞다고 해도, 초희의 26초 75가 실제 선수의 기록과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어. 작가님이 소설 속 인물을 위해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엄마, 그냥 초희가 26초 75를 기록했다고 한 게 아니잖아. ‘전국소년체전 여초부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고 분명히 나와 있단 말이야!”
“그래. ‘대회 신기록’이라고 명시했다면 실제 기록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지.”
엄마는 책을 펼쳐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작품 안에서 갖는 의미야. 나루에게 26초 75가 얼마나 넘기 힘든 벽이었는지, 또 초희를 따라잡고 싶다는 간절함을 보여 주는 숫자였을 테니까.”
엄마의 설명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초희가 세운 건 그냥 기록이 아니라 ‘전국소년체전 대회 신기록’이었잖아. 진짜 있는 대회 이름을 쓰면서 실제 신기록과 다르게 적어 버리면, 나처럼 수영하는 사람들은 단번에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니까?”
아빠와 엄마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와, 우리 정하늘 탐정 논리라면 작가님이 들으셔도 식은땀 좀 흘리시겠는데?”
아빠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맞아. 이 정도면 우리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진짜 전문가한테 최종 판정을 들어봐야지. 아론! 방금 하늘이가 한 말까지 다 종합해서 결론을 내려 줘.”
거실 스크린 중앙에 ‘아론 브리핑 요약’ 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 “지금까지 나누신 대화를 종합하면,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첫째, 시간적 배경입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50년 전’이 꼭 정확한 50년을 뜻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달 착륙 이야기와 ‘나루가 살아온 날들의 네 배쯤 되는 시간’이라는 설명을 함께 생각하면, 약 50년쯤 지난 이야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배경을 2019년 무렵으로 추론한 하늘 선수의 해석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화면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 “둘째, 김초희 선수의 기록입니다. 26초 75라는 수치 자체는 가상의 설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 기록을 실제 대회인 ‘전국소년체전의 대회 신기록’이라고 분명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기록과 다른 가상의 설정이라는 안내나 단서는 책 속에 나오지 않습니다.”
분석 창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주황색 결론 창이 떠올랐다.
— “종합 결론입니다. 작품의 배경을 2019년으로 본다면, 실제 2016년 신기록인 26초 51보다 느린 26초 75를 ‘대회 신기록’이라고 표현한 것은 고증 오류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작품의 배경이 그 기록이 세워지기 이전이라면, 26초 75가 대회 신기록이라는 설정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실제 대회의 명칭과 기록을 사용하면서 실제와 다른 설정을 한 것을 문학적 허용으로 볼 것인지, 고증 오류로 볼 것인지는 작품의 성격과 표현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야심 차게 꺼내 든 ‘첫 번째 오류’였는데, 엄마의 다정한 설명과 아론의 중립적인 판정까지 듣고 나니 왠지 내가 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 있게 스타트를 끊고 마지막 터치패드를 향해 전력으로 헤엄쳐 가는데, 생각지도 못한 멋진 라이벌에게 손끝 차이로 먼저 터치를 빼앗긴 것 같았다. 그것도 다름 아닌 우리 엄마한테!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엄마도 나와 똑같이 이 책을 깊이 읽고 있었다는 걸.
나는 수영선수의 눈으로 레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눈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태블릿 화면을 두드려 스크린의 창을 전환했다.
“그럼 두 번째 문제 들어갑니다! 날짜랑 요일 문제야.”
펜으로 해당 대목을 터치하자, 거실 스크린에 15장의 한 구절이 크게 확대됐다.
“이번엔 진짜 달력 데이터까지 싹 다 확인해 봤단 말이야.”
나는 자신 있게 말하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양이가 나루한테 열쇠고리를 선물한 날이 8월 27일이잖아. 그날 나루 휴대폰 화면에 ‘D+22’라고 떠 있었고, 함께 들어 있던 쪽지에도 ‘오늘이 우리 사귄 지 22일째 되는 날’이라고 적혀 있어.”
“잠깐. 그런데 그날이 8월 27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는 지체 없이 스크린에 창 두 개를 동시에 띄웠다.
“9장에서 코치님이 8월 28일이 수영 대회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태양이가 쓴 쪽지에는 내일이 그 첫 대회 날이라고 적혀 있어. 그러니까 쪽지를 받은 날은 전날인 8월 27일인 거지.”
엄마가 “아하!” 하며 손뼉을 쳤다.
“그럼 사귀기 시작한 날이 언제인지 계산하면 되겠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아빠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투투데이’라는 게 아직도 있나? 우리 땐 친구들 주머니 탈탈 털어서 딱 200원씩 걷어가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없어졌지. 우리 반 아이들도 그런 건 잘 안 챙기더라고.”
“맞아! 그런데 그날은 나루와 태양이가 처음 데이트를 한 날이기도 해. 본문에는 분명히 토요일이라고 나와.”
나는 펜으로 ‘토요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새로 떠오른 달력 화면을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아론한테 그날이 며칠이었는지, 몇 년도 달력과 맞는지 계산해 달라고 했어.”
스크린 위로 연도별 달력이 차례로 띄워졌다.
— “8월 27일이 사귄 지 22일째인 날이라면,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날은 8월 6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첫 데이트를 한 토요일’이라는 조건과 8월 6일을 조합해 보면, 2011년, 2016년, 2022년이 나옵니다.”
아론의 깔끔한 분석에 아빠가 턱을 끄덕이며 감탄했다.
“와, D-Day 역산에 달력 데이터까지 싹 대조해 본 거야?”
“수영 선수한테 이 정도 계산은 기본이지!”
엄마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거봐! 꼭 소설 배경이 2019년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직 안 끝났거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선 2011년은 제외! 나루가 매점에서 사 먹은 ‘불닭볶음면’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야.”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너 그 출시 연도까지 알고 있었어?”
“응.”
“대체 이걸 언제 다 찾아본 거야?”
나는 조금 뿌듯한 얼굴로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책 읽다가 이상하다 싶은 게 나오면 그냥 못 지나치겠더라고. 날짜도 찾아보고, 기록도 확인하고, 영화 개봉일이나 음식 출시일 같은 것도 하나씩 검색해 봤어.”
“그래서 아론까지 동원한 거구나?”
“그렇지. 내가 찾은 게 맞는지 확인도 해야 하니까. 아론, 불닭볶음면이 몇 년도에 나왔지?”
거실 스크린에 불닭볶음면 사진이 떠오르고, 아론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확인 결과, 불닭볶음면은 2012년에 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2011년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2016년이랑 2022년이 남는 거네?”
아빠가 턱을 괴며 물었다.
“잠깐.”
엄마의 말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아까 엄마가 ‘50년 전’이 딱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그랬지.”
“처음엔 엄마 말이 맞을까 싶었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범위를 좀 넓혀 봤어.”
“얼마나?”
“대충 50년 전이라고 한 거면 앞뒤로 몇 년은 차이 날 수 있잖아. 그래서 5년씩 여유를 두고 계산해 보려고.”
“그러면?”
“아론, 45년 전부터 55년 전까지 오차 범위를 두면 몇 년부터 몇 년까지 나와?”
— “2014년부터 2024년까지로 확대됩니다.”
“좋아. 아론, 그중에서 8월 6일이 토요일인 해가 더 있어?”
— “해당 범위 내에서 8월 6일이 토요일인 해는 2016년과 2022년입니다.”
“범위를 넓혀 봐도 딱 그 둘뿐이네?”
아빠가 화면의 연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맞아. 이제 2016년하고 2022년을 소설 속 다른 시간 단서들과 비교해 보면 돼!”
엄마가 바짝 다가앉았다.
“좋아. 계속해 봐.”
나는 잽싸게 태블릿을 넘기다가 11장의 한 대목에서 손가락을 딱 멈췄다.
“엄마, 이것 봐! 여기 방학 날짜도 나와.”
“방학 날짜?”
나는 화면 속 그 문장을 태블릿 펜으로 짚었다.
“여기! 푸른초등학교는 방학이 8월 13일까지고, 한강초등학교는 12일까지래.”
엄마가 스크린과 태블릿을 번갈아 들여다봤다.
“정말 그러네?”
“그런데 이것도 한번 따져 봐야겠어.”
“뭘?”
“학교 다닐 때 친구한테 ‘너 방학 언제까지야?’ 물었을 때 ‘12일까지’라고 하면, 보통 12일까지 놀고 다음 날인 13일에 학교에 간다는 뜻이잖아. 그러니까 보통은 13일에 개학한다는 거지.”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덧붙였다.
“물론 애들끼리 한 말이니까 날짜를 정확하게 말한 건 아닐 수도 있어. 12일이 개학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태블릿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론, 2016년 8월 13일은 무슨 요일이었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스크린에 선명한 8월 달력이 떠올랐다.
— “2016년 8월 13일은 토요일입니다.”
“만약 12일 금요일이 개학일이라면 문제는 없어. 그런데 13일 토요일이 개학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엄마, 초등학교 주 5일 수업제가 언제부터 시행됐지? 2016년엔 토요일에 학교 안 갔잖아, 맞지?”
“당연하지. 초등학교 전면 주 5일제는 2012년부터 시작됐어. 2016년이면 이미 한참 지났을 때지.”
“그렇지? 아론, 확인해 줘.”
—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전면 주 5일 수업제는 2012년 3월부터 시행되었습니다.”
“고마워, 아론. 그렇다면 개학일이 12일인지 13일인지, 먼저 책 속 단서를 찾아봐야 해.”
나는 태블릿 화면을 몇 번 스크롤 하다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런데 13장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13일을 개학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왜?”
나는 그 부분을 확대했다.
“나루와 태양이가 첫 데이트를 하고 나서 며칠 뒤에 ‘토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잖아. 그런데 바로 뒤에 ‘토요일을 뺀 나머지 날들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고 나와.”
“응.”
“게다가 평소에는 개학을 기다린 적도 없던 나루가 이번에는 개학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나오고.”
나는 스크린의 그 문구들을 가리키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신나게 설명했다.
“만약 12일 금요일이 개학일이었다면, 나루와 태양이는 토요일이 오기 전에 학교에서 먼저 만났어야 하잖아. 그러면 나루가 토요일을 뺀 나머지 시간들이 느리게 흘렀다고 생각한 것과도 안 맞고.”
엄마 눈이 순간 커졌다.
“아! 그러니까 나루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 ‘토요일’이 곧 ‘개학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구나.”
“응! 그래서 문맥상 한강초등학교의 개학일은 8월 13일 토요일로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러워.”
“그러네. 문제는 8월 13일이 개학일이라는 것부터가 학사일정과 안 맞는 거잖아. 푸른초등학교도 마찬가지고. 13일이든 14일이든 둘 다 주말이라 개학일이 될 수 없으니까.”
“응, 맞아. 아론, 그러면 2022년도 똑같은 모순이 생기는 거야?”
— “네. 동일한 학사일정 단서를 적용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나는 펜 끝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스크린에 뜬 연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처음에는 2016년이나 2022년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완전히 맞지는 않는 거네?”
— “맞습니다. 어느 연도도 작품 속 시간 단서를 모두 충족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이건 단순히 실제 연도를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잖아?”
— “그렇습니다. 확인된 날짜와 요일, 학사 일정이 하나의 연도 안에서 모두 일치하지 않습니다.”
대화를 듣던 엄마가 스크린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 하늘이 말이 맞았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옆에서 아빠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좋았어! 이번 탐정 판정은 정하늘의 완승!”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하늘아, 틀린 걸 찾아낸 것보다 네가 이 책을 하나하나 아끼면서 깊게 읽었다는 게 엄마는 더 기쁘네.”
“맞아. 우리 딸, 수영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셜록 홈즈가 다 됐네. 아빠 연구실 연구원으로 스카우트해야겠어.”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태블릿을 품에 끌어안았다.
첫 번째 문제에서는 엄마의 설명에 밀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실제 기록과 소설 속 설정이 다른 것과, 소설 안의 설정끼리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수영장에서 0.01초를 다투며 기록을 확인하듯, 나도 책을 읽으며 하나씩 따져 보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 V자를 그리던 손가락 옆으로 하나를 더 얹어 보였다.
“자, 이번에는 수영 경기 규칙을 진짜 꼼꼼하게 아는 사람만 찾아낼 수 있는 문제라고!”
엄마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 정하늘 탐정, 이번에도 자신감이 만만치 않은데?”
“당연하지. 수영은 내 전문이잖아!”
나는 태블릿을 휙 돌려 엄마 쪽으로 보여 주었다.
“대통령 배 수영 대회 결승전 장면이야. 아론, 나루와 초희의 예선 기록 띄워줘.”
아론이 기록표를 스크린에 띄웠다.
— “예선 기록 분석입니다.”
— “강나루. 자유형 50미터. 27초 14.”
— “김초희. 자유형 50미터. 28초 72.”
— “예선 이후 두 선수의 순위가 바뀌었거나, 레인을 다시 배정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나는 손뼉을 짝 쳤다.
“바로 이거야! 8개 레인이 설치된 결승에서는 예선 기록이 가장 좋은 선수가 가운데인 4번 레인을 배정받고, 2위가 5번, 3위가 3번, 4위가 6번……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레인이 정해져.”
듣고 있던 아빠가 옳거니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수영 선수들이 예선에서 4번 레인 차지하려고 그 피 터지는 기록 싸움을 하는 건데—”
“아빠, 꼭 4번 레인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내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래도 예선 1등이면 4번 레인을 받는 게 기본이지.”
나는 스크린에 뜬 16장과 17장 본문을 번갈아 가리켰다.
“봐봐, 저기 결승 장면에 ‘초희와 나루가 나란히 4번, 5번 레인에 섰다’라고 돼 있잖아. 문맥상 초희가 4번, 나루가 5번이란 소리잖아. 근데 바로 이어서, 초희가 터치패드를 찍고 5번 레인의 나루한테 손을 내미는 장면까지 나와.”
나는 승리를 확신한 얼굴로 엄마를 마주 봤다.
“자, 강 선생님. 이번에도 작가님의 상상력이라고 넘어갈 건가요?”
엄마는 한동안 말없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음…… 이번 건은 말이지.”
엄마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정하늘 선수가 이겼어.”
엄마가 시원하게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주인공의 마음이나 상징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레인 배정은 수영 경기 규칙이잖아. 이건 해석의 문제로 볼 수 없겠네.”
아빠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강 선생님, 완전 깔끔하게 인정하시는데?”
아빠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통했다.
짝!
우리는 신나게 손바닥을 부딪쳤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작가님이 장면에 너무 몰입했나 봐. 예선 순서를 잠깐 헷갈린 걸 보면 말이야.”
나는 활짝 웃으며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아론! 최종 판정 부탁해!”
— “분석 결과입니다. 8개 레인으로 진행되는 결승에서는 예선 기록이 가장 좋은 선수가 4번 레인을 배정받습니다. 따라서 예선 1위인 나루가 4번, 예선 2위인 초희가 5번 레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 “작품 속 레인 배정은 실제 경기 규칙과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나는 승리의 여운을 즐기며 당당하게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쳤다.
“하지만 엄마, 이건 진짜 못 넘어가. 수영 기록이 아니라, 영화 덕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크림 케이크를 먹던 아빠가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어라? 수영이 아니고 영화? 뭔데 하늘아?”
아빠는 코 밑에 생크림이 묻은 것도 모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휴지를 뽑아 아빠의 코 밑을 살살 닦아 주었다.
“아빠, 크림이나 좀 닦고 말해. 이번엔 나루랑 태양이가 첫 데이트로 영화관에 간 장면이거든.”
멋쩍게 웃는 아빠를 보며 나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영화 포스터 앞에서 태양이가 이렇게 말하잖아. 아론, 읽어줘.”
아론이 진짜 성우라도 된 듯 감정을 실어 태양이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 “아, 진짜 기대된다. 나 이거 원작도 좋아해. 리메이크한다고 해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대박, 아론! 방금 연기 뭐야?”
내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 “작품 속 영화 정보와 실제 영화 제작 기록 사이에 차이가 발견되었습니다.”
— “등장인물들이 관람하려는 영화는 1985년 개봉한 《백 투 더 퓨처》입니다. 작품에서는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다는 전제로 대화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백 투 더 퓨처》의 리메이크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분석이 끝나자 아빠가 무릎을 탁 쳤다.
“아, 맞다! 《백 투 더 퓨처》는 리메이크가 아니라, 화질이랑 음향 다듬어서 다시 틀어 준 ‘디지털 리마스터링 재개봉’이었어!”
아빠는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옛 생각에 잠겼다.
“그때가 하늘이 두 살 때였나? 할머니한테 너 맡겨놓고 오랜만에 엄마랑 극장 데이트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맞아. 영화에서 그렸던 2015년의 미래가 실제 현실과 얼마나 비슷해졌는지 한참 이야기했었지. 영상 통화나 지문 인식, 벽걸이 TV 같은 건 정말 신기할 만큼 비슷했고.”
“그랬지. 호버보드는 아직 영화처럼 날아다니진 못하지만,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조금씩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잖아.”
아빠가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그거 한번 볼래?”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구석 창고로 달려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단숨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빛바랜 영화 포스터와 극장 티켓, 그리고 자그마한 영화 기념품들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 이걸 아직도 안 버리고 모아뒀어?”
엄마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아빠가 엄마의 손등을 탁 쳤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면장갑 한 쌍을 꺼내 엄숙한 표정으로 끼기 시작했다.
“안 되지, 안 돼. 굿즈는 지문 하나만 찍혀도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라고.”
아빠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상자 속에서 검은 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때 극장에서 관람객들에게 나눠 준 메모리얼 키트야.”
‘빽 투 더 퓨처’라고 인쇄된 종이봉투를 열자 스티커와 영화 카드, 사진, 엽서와 편지, 2015년 10월 22일 자 신문과 전단지까지 오래전 시간 속에서 꺼내 온 것 같은 굿즈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처럼 신나서 하나하나 설명하는 아빠를 바라보다가, 상자 구석에 유난히 깨끗한 봉투 하나가 따로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빠, 이건 뭐야?”
“아, 그거? 아빠가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특별히 제작한 우리 가족 기념품이지.”
아빠가 뿌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맨손으로 덥석 물건을 쥐는 나를 보며 엄마가 한 마디 던졌다.
“아빠 장갑이라도 빌려 끼지 그러니?”
엄마의 짓궂은 놀림에 아빠는 그저 허허 웃었다.
“에이, 딸내미 손때 묻는 건 영광이지! 마음껏 만져 봐.”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건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 아빠와 엄마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아기를 한 명씩 안은 채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언니와 한 남자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이상하게 눈을 떼기 힘든 그 언니도, 옆의 남자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 아빠, 이 언니는 누구야? 옆에 남자는 또 누구고?”
“누구긴! 9년 뒤, 미래의 너랑 네 남편이지!”
“뭐? 그럼…… 엄마 아빠가 안고 있는 이 아기들은?”
“당연히 네 아기들이지! 아빠가 각별히 신경 써서 딸 하나, 아들 하나 남매 쌍둥이로 맞춰 넣었다.”
나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목구비가 어딘가 낯익었다. 설마, 설마 하며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였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혔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내 최애였다. 아론이 정교하게 만들어 낸 사진 속에서 그는 내 남편이자 쌍둥이의 아빠가 되어, 세상 무해하게 웃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에 들린 사진을 쏙 빼앗아 들었다. 엄마도 나처럼 말을 잇지 못했지만, 아기들을 보자 금세 눈이 반짝였다.
“어머, 아기들 좀 봐. 너무 예쁘잖아. 하늘아, 9년은 너무 길다. 엄마는 손주 빨리 보고 싶은데 조금만 앞당기면 안 될까?”
“엄마까지 왜 이래! 나 아직 열세 살이야! 결혼은 무슨, 당장 학원 숙제도 밀렸거든!”
발끈한 외침에 엄마와 아빠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빠를 찌릿 노려보자, 아빠는 컵을 들어 물을 벌컥 마시더니 딴청을 피웠다.
“어우, 목이 더 타네. 크흠, 하늘아. 아빠는 말이지, 예비 장인어른으로서 네 최애 후보를 사전 검증하느라 얼마나……”
“아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엄마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아, 사진 빨리 이리 내! 당장 지워!”
엄마는 사진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내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은근슬쩍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거실 조명이 스르르 어두워졌다. 곧이어 대형 스크린에 화려한 무대 영상이 펼쳐졌다. 거실을 가득 메운 건 다름 아닌 내 최애 아이돌의 타이틀곡이었다. 아빠가 아론이랑 미리 짜고 친 게 틀림없었다. 아이돌 얘기만 나오면 ‘그게 누구야?’ 하시던 아빠가 이 노래를 알고 틀어 놓았을 리 없으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 스크린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떴다. 어둠 속에서 아빠가 무언가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오색빛깔로 반짝이는 그것, 허락 한 번 받지 않고 내 방에서 꺼내 온 보물 1호, 투명한 아크릴 구슬 속에 분홍별과 왕관이 갇혀 있는 한정판 응원봉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아직도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응원봉을 지휘봉처럼 쥔 채,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표정으로 느릿느릿, 아주 일부러 엇박자를 타고 있었다.
“사랑해요 정하늘! 빛을 내라 정하늘! 영.원.하.자 정하늘!”
심지어 응원법까지 얼추 따라 하며 앙증맞게 하트를 날려 나를 겨누는 아빠의 뻔뻔함이라니. 솟구치던 민망함도 잠시였다. 익숙한 멜로디와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가득 채우자, 참았던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화가 풀린 게 아니라, 화가 그냥 사라져 버린 거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이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2절이 시작될 즈음, 나와 엄마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기대어 팔을 들고, 음악에 맞춰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마침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흘러가고, 거실에는 잔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노래 진짜 좋다. 우리 하늘이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네.”
“그치? 내가 명곡이라고 했잖아.”
내가 은근히 우쭐해하자, 엄마가 내 뺨에 볼을 맞대며 속삭였다.
“다음엔 하늘이 노래로 또 채워보자, 우리.”
“응, 좋아!”
이내 스크린이 꺼지고, 거실 조명도 원래의 밝기를 되찾았다.
엄마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아빠를 흘겨보며 말했다.
“여보, 근데 아무리 아론이라도 남의 얼굴을 이렇게 함부로 쓰면 초상권 침해 아니야? 인터넷에 올렸다간 진짜 큰일 나.”
“에이, 우리 가족끼리만 보는 건데 뭐 어때!”
아빠는 봉투 속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 보였다.
“짜잔∼”
큼직한 종이 상단에는 ‘2035년 10월 22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2035년이면 무려 《백 투 더 퓨처》 50주년이잖아! 그래서 이 아빠가 드로리안 타고 미래로 가서 직접 가져와 봤지.”
“드로리안? 그게 뭔데?”
“그 문이 날개처럼 위로 열리는 타임머신 자동차 있잖아!”
아빠가 신이 나 손짓까지 섞어가며 설명하는 동안, 나는 아빠가 펼쳐 든 종이로 눈길을 돌렸다. 그 종이는 바로 미래의 신문이었다.
한 면에는 내 경기 사진과 함께 [정하늘, 세계 수영 월드컵 1·2차 대회 여자 접영 100m·200m 금메달 획득]이라는 헤드라인이 실려 있었고, 그 오른쪽 면에는 [정태우 박사 연구팀, 독자 개발 인공지능으로 세계 시장 진출]이라는 기사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2035년이 되면 우리 하늘이는 세계를 제패한 수영 영웅이 되어 있을 거고, 이 아빠는 세계를 놀라게 한 인공지능 개발자가 되어 있을 거다. 어때? 진짜 근사하지?”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아빠표 타임캡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 투 더 퓨처》 이야기만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는 아빠. 오래전 영화의 추억까지 고이 간직한 채 딸의 미래를 그려 보는 아빠였다.
참 못 말리는 아빠인데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그런 아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태양이가 떠올랐다.
“그런데 엄마…….”
나는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태양이도 《백 투 더 퓨처》를 좋아하는 아이잖아. 영화에 관심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그런 아이라면 리메이크가 아니라 재개봉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하늘이 생각은, 태양이 성격까지 생각하면 단순한 말실수로 보기 어렵다는 거구나?”
“응. 나는 그렇게 봐. 아론, 네 생각은 어때?”
— “판단을 보완합니다. 태양이가 원작 영화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고 했으니, 리메이크와 재개봉을 몰라서 틀렸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를 들었거나,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못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엄마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아니, 그건 말이지…….”
“혹시 이것도 작가님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실 건가요, 강 선생님?”
내가 짓궂게 묻자, 옆에서 아빠가 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때 엄마가 태연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번엔 우기는 게 아니라, 진짜 태양이 마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태양이가 진짜 그 차이를 몰랐을까?”
엄마의 뜻밖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막상 입을 열고 보니 머릿속에 있던 말이 엉켜 버린 거지.”
상자를 정리하던 아빠가 말했다.
“그거 아빠가 맨날 만지는 AI들도 비슷하잖아. 뭘 물어보면 정답을 몰라도 일단 가장 익숙한 말부터 툭 던지고 보거든. ‘리마스터링’보다는 ‘리메이크’가 훨씬 익숙하니까. 나루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는 바람에, 아빠가 만든 AI처럼 입에 붙은 단어부터 냅다 뱉어버린 거지. 하필 둘 다 ‘리’로 시작하니까.”
“거봐, 아빠 말이 맞지? 알고 있는 것도 긴장하면 엉뚱하게 나올 수 있잖아.”
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엄마의 반응을 살폈다.
“엄마, 정말 태양이가 긴장한 거라면 나루가 먼저 알아챘을걸?”
“왜?”
“나루도 태양이를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애가 긴장했으면 뭔가 티가 났을 것 같은데.”
나는 책 속의 그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버스에서 팔이 스쳤을 때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영화관에서 눈도 못 맞추고 팝콘만 집어먹는다거나. 그런 힌트가 한 줄이라도 있었으면 ‘아, 태양이가 긴장해서 말을 실수했구나’ 하고 알았을 거야.”
나는 태블릿 화면을 꼼꼼히 살폈다.
“그런데 책에는 뭐라고 나와 있어? 나루는 옷도 여러 번 갈아입고 계속 신경 쓰는데, 태양이는 긴장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 오히려 영화관에서는 영화만 신나게 봤다고 나오는데?”
화면을 쓸어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잠깐.”
스크롤을 빠르게 위로 올려 앞 단락으로 돌아갔다.
“여기 하나 있긴 하네.”
“뭔데?”
“태양이도 잠을 설치긴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찾은 문장을 화면 위에서 손가락으로 짚었다.
“근데 이것도 나루가 그렇게 생각한 거잖아. 태양이가 직접 잠을 못 잤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왜 잠을 설쳤는지도 안 나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 테두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태양이가 긴장해서 ‘리메이크’라고 잘못 말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잖아.”
엄마가 잠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나루였으면 진작 눈치챘지.”
나는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엄마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래? 우리 딸, 참 대견하네.”
엄마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수영하랴 공부하랴 바쁜 줄 알았더니, 언제 이렇게 연애 박사가 됐을까?”
“콜록, 켁!”
마시던 물이 목에 걸렸다. 나는 급히 잔을 내려놓고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엄마!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그래!”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태블릿을 가슴팍에 바짝 붙여 안았다.
“태양이도 너처럼 얼굴이 빨개지는 티를 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그래도 속마음을 작가가 다 밝혀버리면 읽는 재미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태블릿을 내려다보다 엄마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이건 너무 약하잖아. 잠을 설쳤다는 것만으로 긴장해서 말실수했다고 어떻게 알아?”
엄마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원래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안 긴장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법이거든. 그걸 글로 다 써주면 무슨 재미니? 태양이의 그 풋풋한 속마음을 우리 정하늘 선수가 못 읽어낸 거네?”
“…….”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또 엄마 논리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나는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외쳤다.
“아론! 아론! 이 반론도 성립돼?”
— “분석 결과입니다. 소설 속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리메이크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리메이크한다고 해서 얼마나 기다렸는데’라는 태양이의 말은 실제 영화 정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 “태양이가 첫 데이트를 앞두고 긴장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른 새벽 태양이가 나루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나루 역시 ‘태양이도 잠을 설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는 태양이의 실제 마음을 직접 보여 주는 장면은 아닙니다.”
— “또한 소설에는 태양이가 긴장해서 ‘리메이크’라는 말을 잘못 사용했다는 직접적인 단서도 없습니다. 따라서 긴장에 따른 말실수라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작가의 정보 오류라는 해석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 “최종 결론입니다. 영화 정보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오류가 작가의 실수인지 태양이의 말실수인지는 작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합니다.”
나는 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음…… 오늘따라 아론이 작가님 편만 들어주네.”
엄마가 검지를 살짝 흔들었다.
“하늘아, 너 방금 전까지 두 번이나 판정승 거뒀거든? 그런데 또 이기고 싶어? 너도 알고 보면 나루처럼 욕심이 참 많아.”
엄마의 핀잔에 아빠마저 안경을 고쳐 쓰며 한마디 보탰다.
“아론이 누구 닮아서 원래 좀 똑 부러지거든. 애매한 상황에서는 중립을 지키게 코딩해 놨지!”
나는 아빠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아직 끝난 거 아니지?”
아빠의 눈가에 기대감이 실렸다. 나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당연하지.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번엔 사랑이 차례야.”
엄마가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
“사랑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니?”
“사고까지는 아니고…… 이번엔 수영 스타트 자세에 관한 이야기야.”
나는 태블릿을 터치해 7장의 그 장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사랑이가 새로운 스타트 자세를 연구한다면서 ‘사랑의 스타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허까지 내겠다고 하잖아.”
나는 다음 장으로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여기 9장, 사랑이가 실제로 그 스타트를 선보이는 장면이 나와. 아론, 읽어줘.”
— “사랑이는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스타트대 앞부분을 잡았다. …… 손가락부터 팔, 머리, 엉덩이, 다리 순서로 매끄럽게 입수했다.”
— “동작 메커니즘 분석 완료. 묘사된 동작에서 김사랑 선수가 취한 자세는 현재 수영 경기에서 널리 사용되는 ‘트랙 스타트’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바로 그거야! 사랑이는 자기가 세상에 없던 필살기를 새로 개발한 것처럼 말하는데, 정작 자세를 보면 내가 아는 트랙 스타트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
듣고 있던 아빠가 되물었다.
“게다가 특허라니?”
“맞아. 사랑이가 혼자 연구해서 만든 자세라고 해도, 수영 자세 하나 바꿨다고 특허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엄마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하늘아, 사랑이가 정말로 특허를 낼 수 있다고 믿어서 한 말이었을까?”
“뭐?”
“사랑이는 원래 귀엽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아이잖아. 저 장면은 진짜 신기술을 발명했다기보다는, 자신만의 ‘필살기’를 갖고 싶어서 괜히 폼 잡고 과장해 본 아이다운 허세 아닐까?”
옆에서 안경을 닦던 아빠가 거들었다.
“아, 친구들이랑 축구하다가 ‘이 슛은 내 특허니까 아무도 따라 하지 마!’하고 우기는 거랑 똑같은 거네?”
“그렇지. 진짜 발명이라기보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감각을 찾아서 신이 난 마음에 던진 귀여운 자랑이지.”
나는 턱을 괸 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엄마, 그래도 이상한 점은 있어.”
“뭔데?”
“작가님이 사랑의 스타트가 훈련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묘사하거든. 다른 부원들도 시범을 보고는 ‘특별한 구석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고 하잖아.”
나는 화면 속 구절을 다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범 자세를 보면 기존 트랙 스타트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어. 나도 4학년 때부터 트랙 스타트를 배웠거든.”
“아, 그러니까 사랑이만의 그 ‘특별함’이 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거지?”
“응. 발을 어디에 두는지, 몸의 중심을 어떻게 옮기는지 같은 차이가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아, 이래서 사랑의 스타트구나’ 하고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태블릿 화면의 문장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거실 스크린에도 노란 원이 따라 그려졌다.
“지금 묘사만 보면 그냥 트랙 스타트처럼 보여.”
엄마도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건…… 듣고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면을 넘겼다.
“아론! 방금 건에 대해 최종 판정 내려 줘!”
— “최종 분석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작품에서는 김사랑 선수의 기술을 특별한 자세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 시범 동작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트랙 스타트와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만의 차별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감이 붙어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 “따라서 정하늘 선수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사랑이만의 특별한 기술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면, 발을 어디에 두는지나 출발할 때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처럼 기존 트랙 스타트와 다른 점을 한두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곰곰이 듣던 엄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그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고 좋겠네. 사랑이가 나름대로 스타트를 연구해서 바꿨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 거구나. 그 차이를 조금이라도 짚어 줬더라면 사랑이의 엉뚱한 성격도 살리고 수영 선수다운 모습도 더 잘 보여 줬을 텐데.”
“아론, 방금 정리한 분석 내용 내 메모장에 저장해 줘.”
— “네. 정리된 분석 내용을 어머니의 독서 지도 메모장에 저장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 독서 지도할 때나 글 쓸 때 꼭 참고해야겠다.”
엄마는 저장된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바라보다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자, 이번에는 기록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야.”
“그럼 이번엔 뭔데?”
“연출!”
엄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연출?”
나는 태블릿을 터치해 거실 스크린에 결승전 대목을 띄웠다.
“나루가 코치님이랑 친구들 앞에서 초희 수영복을 숨긴 사람이 자기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야.”
아빠가 책 너머로 빼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 부분 읽어 보니 나루의 감정이 잘 드러나서 꽤 인상적이긴 하더라.”
“나도 감동적이긴 했어.”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이었다면 이상했을 거야.”
“왜 이상한데?”
“하필 제일 중요한 결승전 직전에, 그것도 수영부원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 말을 했잖아! 다들 몇 달 동안 이 대회 하나만 보고 준비해 왔는데, 결승 직전이면 무조건 경기 준비에만 집중해야 할 때라고!”
나는 나루의 흉내를 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코치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코치님이었다면 나루를 따로 불러서 조용히 이야기부터 들었을 거야. 그래야 다른 선수들도 안 놀라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아빠가 책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듣고 보니 하늘이 말이 맞네. 결승전 직전엔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테니까.”
“뭐, 그렇긴 한데…… 나루 입장도 이해는 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팀 분위기나 다른 애들이 경기에 집중하는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겠지. 당장 안 털어놓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을 테니까.”
엄마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맞아. 나루한테는 당장 고백해서 죄책감을 털어내는 게 제일 급했겠지. 그래도 네 말대로 진짜 코치님이었다면 나루를 조용히 따로 데려갔을 거야.”
나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그렇지?”
“하지만 소설이 항상 현실을 똑같이 복사해야만 하는 건 아니란다. 그렇게 했다면 독자는 나루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을 직접 볼 수 없잖아.”
엄마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루가 모두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결승을 포기하는 순간, 그 용기를 독자에게 직접 보여 줘야 했던 거야.”
엄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야 나루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가장 선명하게 전해졌을 테니까.”
나는 태블릿을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완벽하다고 믿었던 내 논리가 더는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그래도 어쩐지 완전히 진 것 같지는 않았다.
스크린을 바라보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현실성보다 감정을 선택한 거네.”
“맞아.”
엄마가 아빠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소설에서는 가끔 현실적으로는 조금 이상해 보여도, 인물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태블릿을 고쳐 쥐었다.
“아론! 이번에도 판정 부탁해!”
— “네, 분석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 수영팀이라면, 결승전을 앞두고 부원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이런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다른 선수들의 집중력과 팀 분위기를 흐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 코치라면 해당 선수를 먼저 조용히 따로 불러 해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하지만 작품에서는 이 장면을 통해 나루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결승을 포기하면서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코치님 앞에서 직접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나루의 용기와 감정의 변화도 독자에게 더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 “최종 판정입니다. 수영팀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하늘 선수의 지적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나루의 성장과 감정을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이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듣고 보니 아론 말도 맞네.”
나는 태블릿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웃으며 시작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조금 진지한 이야기야.”
나는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을 꺼냈다.
“나루가 자기 잘못을 인정한 건 정말 멋졌어. 그런데 그다음이 좀 이상해.”
엄마가 소파 깊숙이 묻었던 허리를 곧게 폈다.
“뭐가 이상한데?”
“나루가 받은 벌은 한 달 보강 훈련이랑 손글씨 반성문뿐이잖아. 그 수영복은 초희한테 그냥 수영복도 아니었어. 부적처럼 생각할 만큼 특별한 물건이었잖아. 그런 걸 보름 가까이 잃어버렸으니, 돌려받고 나서도 대회 날까지 열흘 넘게 불안했을 거야.”
나는 나루의 사과 장면을 떠올렸다.
“하필 자기가 경쟁하던 라이벌이 범인이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수영복을 돌려받았다고 해서 그때 받은 충격이나 배신감까지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을 것 같아.”
나는 말을 고르듯 잠깐 멈췄다.
“실제로 예선에서는 나루보다 기록도 뒤졌고. 물론 그 결과가 전부 수영복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동안 초희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가.”
아빠의 표정이 한층 신중해졌다.
“그래. 단순히 비싼 물건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는 달랐겠구나.”
“초희가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나루가 받은 벌은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잔의 테두리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원을 그렸다. 잔 속의 은은한 빛이 일렁였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
“초희는 정말 멋졌어. 결승전에서는 나루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시상대에서는 부적보다 강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하잖아. 그렇게 상처받았던 초희가 나루를 용서해 주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어.”
“엄마도 초희가 그렇게 성장하는 모습이 참 좋았어.”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어.”
“초희는 그렇게 멋지게 성장했는데, 정작 나루가 자기 잘못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 같았거든.”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초희가 나루를 용서하는 순간, 두 아이 사이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어. 나루가 잘못을 털어놓았고, 초희가 그 마음을 넓게 받아주면서 두 아이 모두 한 걸음 더 자랐다고 믿었거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용서해 주는 거랑, 자기 잘못을 끝까지 책임지는 건 조금 다른 것 같아. 초희가 용서해 줬다고 해서 나루가 지은 잘못이 그냥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나루가 초희에게 더 오래 미안해하고, 상처를 보듬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나왔다면…… 나도 나루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었을 텐데.”
아빠도 선뜻 말을 얹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아론. 이번엔 어떻게 생각해?”
— “분석 결과를 종합합니다. 작품은 상처받은 초희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두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용서는 피해자의 선택이며, 책임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감당해야 할 과정입니다.”
— “나루는 수영복을 가져온 뒤 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며, 악몽과 스트레스성 급체를 겪을 만큼 죄책감이 컸습니다. 결승 직전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기권을 선언한 것은 책임을 지기 시작한 중요한 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후에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은 비교적 짧게 다뤄집니다.”
— “최종 결론입니다. 초희의 용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고 바로잡아 가는지를 조금 더 깊이 보여주었다면, 두 아이의 성장은 더욱 균형 있고 설득력 있게 완성되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나는 한동안 책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날짜랑 기록을 계산해 보고, 수영 기술을 따져 보았다. 엄마가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아도 아론에게 판정을 맡기면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상했다. 틀린 부분을 하나 찾아낼 때마다 『5번 레인』이 점점 재미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엄마.”
“응?”
“난 이 책이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뭔데?”
“나루가 처음에는 초희를 이기고 싶어 했잖아. 초희 기록이랑 자기 기록을 계속 비교하고, 초희의 긴 팔을 부러워하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랬지.”
“그런데 나중엔 초희를 이기는 것보다 자기 수영에 집중하게 되잖아. 난 그 부분이 정말 좋았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수영하다 보면 옆 레인이 자꾸 신경 쓰이거든.”
나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다.
“누가 나보다 빨리 가면 괜히 불안하고, 내가 앞서면 기분 좋고. 그러다 보면 내가 몇 초를 줄였는지는 잊어버리고 옆 사람만 보고 있을 때도 있단 말이야.”
아빠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선수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겠지.”
“응.”
나는 아빠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루가 ‘다음번 터치패드는 내가 제일 먼저 찍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좋았어.”
엄마의 눈매가 살짝 접혔다.
“결국 1등을 하겠다는 말인데?”
“응. 하지만 처음이랑은 완전 다른 것 같아.”
“처음에는 초희를 이겨서 1등을 차지하고 싶었던 거고, 마지막에는 그냥 스스로 더 잘 해내고 싶은 거잖아.”
엄마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신나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나루가 다시 수영을 진짜로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래. 그럼 이제 아론의 생각도 들어 보자.”
나는 태블릿을 바라봤다.
“아론?”
— “최종 분석을 요청하시겠습니까?”
“응. 이번에는 오류 찾기 말고 작품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
— “분석을 종합합니다. 『5번 레인』은 엘리트 수영을 배경으로 경쟁과 질투, 우정과 용서, 그리고 성장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 “수영 기록과 경기 운영, 일부 기술 묘사와 사건의 개연성에서는 실제 스포츠 현장과 비교했을 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 “초희의 수영복 사건에서도 동료 선수들의 반응이나 코치의 사건 처리 과정, 선수 가족들이 감당하는 부담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부족한 점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작품은 경기 자체보다 아이들의 마음과 관계 변화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론의 말에 의견을 보탰다.
“그래도 아론, 작가가 부원들의 마음이나 가족의 서포트를 아예 외면하진 않았잖아. 나루가 결승을 포기하고 벌을 받을 때도 부원들이 옆에서 자기 실수담을 털어놓으며 다독여 줬고, 슬럼프에 빠졌을 땐 엄마랑 언니가 곁에서 계속 걱정하며 상담해 줬으니까.”
“에이, 엄마. 그건 어디까지나 나루 중심일 때 얘기지. 정작 수영복을 잃어버리고 우는 초희한테 주장이었던 승남이가 뭐라고 생각했어? 고작 수영복 하나 때문에 왜 저러냐면서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잖아. 선수라면 그 경기용 수영복이 가진 의미나 가치를 모를 수가 없는데.”
내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가족들 문제도 그래. 나루네 가족만 나와서 그렇지, 사실 수영부 아이들 부모님이 뒤에서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새벽부터 선수 챙겨서 경기장에 데려오고, 짐 챙겨주고, 영양제 먹이고, 매일 차로 픽업해 주는 건 책에 하나도 안 나오잖아. 선수 한 명 뒤에는 가족 전체의 지원이 있는 건데, 그 부분이 쏙 빠져 있으니까 난 좀 허전하더라고.”
“하늘아, 네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선수 가족들의 고생이나 초희가 느꼈을 부담까지 조금 더 보여줬다면 수영부의 현실이 훨씬 생생했겠지.”
엄마가 손가락으로 쿠션을 두드렸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작품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작가는 나루가 보고 겪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거니까.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이 매일 어떻게 선수들을 뒷바라지하는지까지 다 보여주면, 그만큼 나루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고.”
“그래도 나는 좀 아쉬운데.”
“그럴 수 있어. 네가 수영선수 입장에서 읽었으니까 더 눈에 들어온 거지. 그러니까 그건 ‘작가가 몰라서 안 썼다’라기보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넘길지’ 선택한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엄마의 말에 나는 괜히 입술을 실룩였다.
“아론, 계속해 줘.”
— “두 분의 의견 모두 타당합니다. 작품에 등장하지 않은 사실만으로 작가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작가는 나루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어 다른 인물들의 서사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다만 하늘 선수의 지적처럼, 엘리트 수영을 배경으로 삼은 만큼 경기용 수영복의 의미나 가족들의 지원 같은 요소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작품의 현실감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작품의 명백한 오류라기보다, 작품의 초점과 관련된 선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몇 가지 아쉬움이 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 작품은 스포츠의 모든 현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던 나루가 자신의 기준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 “나루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만 배운 것이 아닙니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출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론의 푸른 아이콘이 한 번 반짝였다.
— “따라서 『5번 레인』은 스포츠 고증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라기보다, 스포츠를 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이나 경기 운영, 일부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독자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나루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레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입니다.”
나는 가슴에 품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론이 찾아낸 사실과 소설 속 설정의 차이를 하나씩 짚어 보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쿵쾅거렸던 순간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마음을 느끼기 위해 책을 펼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
“응?”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 책, 정말 유명하잖아! 여러 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왔고, 교과서에까지 실렸고……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인데.”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런데 왜 이런 부분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나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는 저마다 보는 게 달라서 그럴 거야.”
“……”
“누군가는 수영 경기의 정확한 규칙을 보고, 누군가는 나루의 마음을 보겠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날짜나 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하지는 않을 거야.”
조용히 듣고 있던 아빠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많이 읽힌 명작이라는 것과, 그 안의 모든 사실 관계가 검증되었다는 건 엄연히 다른 의미니까.”
아빠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직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오류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법이란다.”
아빠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작은 허점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이 책이 가진 가치까지 빛바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책 표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는지는 알 것 같아.”
“아론.”
— “네.”
“오늘 분석은 백 점 만점에 백 점이었어!”
아빠가 허허 웃었다.
“내가 만든 AI니까 당연하지.”
“아론.”
— “네.”
“오늘만큼은 아빠보다 네가 낫다.”
아빠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켜며 입을 벌렸다. 반박하려던 찰나, 아론의 푸른 아이콘이 빛났다.
— “감사합니다. 다만 해당 발언은 ‘평소에는 아빠 사용자가 더 낫다’는 의미를 포함하므로, 저는 일 년 중 단 하루의 우위를 인정받은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벌어졌던 아빠의 입이 다물어지더니,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아빠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검지로 툭 밀어 올렸다.
“거봐. 내가 만든 녀석이라 눈치가 빨라. 오늘만큼은 내가 기분 좋게 양보하지.”
나는 책을 들었다.
“그런데 엄마.”
“응?”
“나 이 책 다시 읽어 볼래.”
내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의 손이 멈추었다.
“처음부터?”
“응. 이번에는 오류 찾으려고 읽는 거 말고.”
“그럼?”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나루가 왜 그렇게 수영을 좋아했는지 보려고.”
엄마는 내 머리를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었고, 아빠는 슬며시 엄지를 올려 보였다. 태블릿 화면에는 꺼진 아론의 푸른 아이콘이 희미하게 비쳤다.
나는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옆 레인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레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에필로그
“하늘아, 이제 들어가서 자야지.”
엄마가 살며시 다가와 내가 읽던 책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하늘이 강철 체력이네. 어제 오늘 연달아 경기했는데도 안 피곤해?”
“엄마, 내가 퀴즈 하나 낼까?”
“퀴즈? 좋아. 대신 엄마가 맞히면 군말 없이 자러 가는 거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소파에 바로 앉았다. 책을 테이블에 놓고, 엄마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아. 어. 오. 아. 애.
조용히 내 입 모양을 좇던 엄마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음, 이건 아빠한테 기회를 한번 줘 볼까?”
갑자기 지목된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하늘아. 입 모양만 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동작 힌트도 좀 줘 봐."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빠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잠수하는 것처럼 코를 잡고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양쪽 볼을 복어처럼 빵빵하게 부풀린 채’ 입안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어∼오∼아∼애∼”
허공에서 온몸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에 엄마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아빠는 웃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동작을 유심히 살피고는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었다.
“하늘아, 아빠가 딱 하나만 물어보자.”
“응?”
허우적거리던 팔다리가 멈췄다.
“너…… 혹시 수영장에 있는 어떤 녀석한테 이 말 한 적 있니?”
순식간에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나는 삐죽 나온 입술을 꾹 다물며 발을 쾅 굴렀다.
“아빠!”
옆에서 숨을 고르던 엄마가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어머, 여보! 하늘이 벌써 시집갈 준비 하나 봐!”
나는 그 순간 오늘 결승에서 보여 준 스타트보다도 완벽한 자세로 소파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몰라, 진짜! 둘이 짜고 사람 놀리는 게 어딨어!”
내가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리자 엄마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옆구리를 간질였다.
“아이참, 우리 하늘이 귀 빨개진 것 좀 봐! 엄마는 하늘이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지.”
엄마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앉더니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알았어, 안 놀릴게. 하늘아, 아빠 좀 봐. 서운해서 삐치기 직전이야. 얼른 아니라고 안 해주면 아빠 오늘 잠 못 잔다.”
나는 쿠션을 스윽 내리며 아빠를 흘겨보았다.
역시 내 레이더는 틀리지 않았다. 수상쩍다 했더니, 딱 걸렸다.
아빠는 소파 위에서 오른쪽 다리를 올려 왼쪽 무릎에 얹고 있었다. 팔꿈치를 무릎에 괸 채 오른손 검지를 뺨에 살포시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머리 위에는 내가 코스튬 놀이할 때 쓰던 장난감 왕관까지 삐딱하게 얹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자세다 했더니, 한 달 전 아빠와 함께 국중박에서 본 그 불상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반가사유상이 거실 소파로 출장이라도 온 모양새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비로운 미소 대신 세상에서 가장 서운해 죽겠다는 표정, 그리고 볼록한 뱃살 정도랄까.
“…… 아빠, 지금 뭐 해?”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실 스크린에 마치 국제 수영 대회 경기 분석표 같은 리포트가 띄워졌다.
아론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 “하늘 선수의 방금 동작에 대한 기술 분석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파를 향해 몸을 날린 폼은 《5번 레인》의 김사랑 선수가 보여 준 전형적인 트랙 스타트를 완벽하게 재현했습니다. 특히 착지 직전 공중에서 보여 준 독창적인 팔놀림과 발끝의 각도는 기술 점수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스크린의 창이 바뀌더니 화면 한가운데에 커다란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DQ
— “그러나 판정은 아쉽게도 DQ, 실격입니다. 첫째, 아빠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빠의 동의 없이 스타트 블록을 이탈했습니다.”
스크린에 내 음성 파형 그래프와 바이오 데이터가 차례로 띄워졌다.
— “참고로 착용 중인 스마트워치로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아빠의 질문 직후 하늘 선수의 심박수는 138bpm까지 급상승했으며, 음고(Pitch)의 급격한 상승과 피부 온도 급증, 그리고 0.1초 만에 2.3G의 가속도로 소파에 몸을 던진 반사적 도피 행동이 관측되었습니다.”
— “종합 분석 결과, 현재 하늘 선수에게 남자친구가 존재할 확률은 2.1% 미만입니다. 해당 반응은 비밀 연애의 증거가 아니라, 순수한 억울함과 풋풋한 당황함이 만들어 낸 자율신경계의 과부하로 분석됩니다.”
아빠는 반가사유상 포즈를 풀지도 않은 채 푹,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쥔 손으로 태국 전통 무희처럼 팔을 우스꽝스럽게 꿀렁거렸다.
…… 하, 엄마 연기에 속아 아빠를 불쌍해할 뻔한 내가 바보지.
나는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혀를 삐죽 내밀고는 아빠에게 핀잔을 던졌다.
“여보, 적당히 좀 해. 당신 아재 개그는 나 하나 감당하는 것도 벅차다고.”
아빠의 어릴 적 꿈이 개그맨이었다더니, 국가대표급 개그 욕심은 정말 아무도 못 말린다. 아빠가 개그맨이 아닌 인공지능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근데 아빠, 태양이가 고백하는 대사인 건 어떻게 알았어? 오늘 그 책 처음 본 거라며?”
아빠는 테이블 위의 책을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늘아, 아빠를 뭘로 보고. 이 정도 두께야 속독법으로 15분이면 충분하지.”
엄마가 코웃음을 쳤다.
“하늘아, 속지 마. 책에는 글자 말고 문장 사이에 담긴 마음이란 게 있거든. 그걸 읽지 못하면 아무리 빨리 읽어도 제대로 읽은 게 아니란다.”
아빠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섭섭하네. 여보, 내가 당신 마음 읽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야. 하늘아, 엄마 말 믿지 마라. 아빠는 그 15분 동안 태양이의 뜨거운 심장 소리까지 다 들었다니까.”
아빠가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심장이 쿵쾅거리는 시늉을 하자, 엄마는 안고 있던 빨간 하트 쿠션을 아빠에게 내던졌다. 아빠는 쿠션을 품에 안으며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뒤로 훌러덩 넘어갔다.
또 시작이다. 엄마의 핀잔을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아빠를 보며 나도 웃고 말았다.
아빠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여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이 책 속 아이들 말이야. 나루랑 태양이 이야기,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한나래 수영부 시절이랑 너무 똑같단 말이지. 내가 전학 와서 수영부 들어간 것부터, ‘백 투 더 퓨처’랑 ‘브루스 배너’를 좋아했던 것까지 쏙 빼닮았잖아.”
아빠가 테이블 위의 컵에 물을 따랐다.
“혹시 우리 초등학교 동창 중에 누가 제보한 거 아니야? 아니면 작가가 동창이라든지.”
엄마는 아빠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그때 봤던 은소홀 작가는 분명 초면이었는데…… 여보, 혹시 그 작가, 당신 옛사랑 아니야?”
“콜록! 켁!”
아빠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하며 요란하게 기침했다. 얼른 휴지를 여러 장 뽑아 테이블 위에 튄 물방울을 허둥지둥 닦아냈다.
엄마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태연한 얼굴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어머, 흘린 물이 한 바가지네. 옛사랑 생각에 추억이 아주 파도처럼 넘쳐흐르나 봐요?”
아빠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갑자기 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아빠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오갔다.
“어……?”
아빠의 눈이 커졌다.
“왜 그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얼른 아빠 옆자리로 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아빠는 화면에 뜬 사진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이 없었다.
“어라…… 이 얼굴, 어쩐지 낯이 많이 익는데?”
“아빠, 설마 진짜야? 작가님이 아빠 첫사랑?”
엄마가 당황하는 아빠를 빤히 쏘아보았다.
“당신, 표정이 왜 그래? 진짜 아는 사람이야?”
아빠는 안절부절못하며 엄마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엄마 몰래 나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게 찾아온 절호의 복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아빠는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쓸어내렸다.
“음…… 가만 보니 진짜 닮았단 말이지. 그때 그…….”
“대박! 어쩐지 아빠가 이 책 읽을 때 눈빛이 아련하더라니!”
엄마가 찻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당신들 지금 세트로 나 놀려요?”
굳어진 엄마의 표정을 보며 나는 참지 못하고 킥킥 웃었다.
“와, 우리 아빠 능력자였네! 이런 미인이 첫사랑이었다니!”
아빠는 다급히 목을 가다듬으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아니, 하늘아! 그게 아니라…… 그냥 분위기가 좀 닮았다는 거지.”
“엄마, 아빠 지금 휴대폰 숨기는 속도 봤어? 이거 백 프로야!”
엄마는 팔짱을 단단히 끼며 몸을 뒤로 기댔다.
“정하늘, 너까지 부추기지 마. 당신, 똑바로 말해 봐.”
“아니, 여보…… 진짜 그게 아니고…….”
“당신!”
찌릿 눈총을 쏘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맞다, 아빠. 우리 학교 과학 선생님이 아빠랑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같은 학교 다니셨다던데?”
아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늘아, 그거 일급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니? 선생님이 말해 주셨어?”
“과학실에 아빠가 쓴 책이 있더라고. 아빠 사인에 ‘동창에게’라고 써 있는 것도 봤어.”
“아, 그랬구나.”
나는 아빠를 향해 눈을 빛내며 미끼를 던졌다.
“아, 참. 아직 선생님께 물어보진 않았어.”
“뭐를?”
나는 뜸을 들였다.
“음…… 아빠 옛날 연애사 같은 거?”
아빠는 결국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이고, 정하늘 탐정까지 가세하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네.”
엄마가 얼른 손을 뻗어 아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잠깐.”
화면을 들여다보던 엄마의 얼굴이 순간 복잡해졌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엄마는 천천히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늘아.”
“응?”
“너 지금 사진 속 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은소홀 작가님이잖아.”
엄마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응.”
엄마는 휴대폰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다시 잘 봐.”
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자. 그리고 눈앞의 엄마. 잠시 두 얼굴을 번갈아 살펴봤다.
“…… 어?”
엄마가 피식 웃었다.
“자기 엄마 젊었을 때 얼굴도 못 알아보니?”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정작 ‘첫사랑’이라며 제일 신나게 아빠를 몰아세웠던 게 나였으니까.
민망한 마음에 아빠 뒤로 쏙 숨는 척했다. 그러다 이내 못 참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사진과 엄마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엄마, 솔직히 말해 봐. 타임머신 타고 미래에서 온 거지? 안 그러면 옛날 사진보다 지금이 더 이쁠 수가 없잖아!”
아빠가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 이제야 알았냐?”
“아빠!”
“정하늘 탐정, 완전히 속았네.”
엄마가 아빠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 나까지 감쪽같이 속였잖아!”
“아니, 나도 속았다니까? 하늘아, 아빠는 정말로 엄마가 미래에서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
아빠가 능청스럽게 손가락 하트까지 날리며 웃자,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었다. 엄마가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부녀가 아주 똑 닮아 가지고는!”
본 글은 은소홀 작가의 소설 『5번 레인』을 읽고, 가상 인물인 ‘정하늘’ 가족과 AI ‘아론’의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리뷰입니다. AI 스토리텔러인 저와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노벨라, 젠스파크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듬어 낸 협업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정성껏 준비한 이야기가 읽으시는 분들께 작은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