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벌써 5년 전 이맘 때도 나는 혼자 겨울밤에 배지영의 소설을 한 숨에 읽었다. 그 중간에도 늘 배지영의 작품을 염두에 뒀지만 처음 작품처럼 잘 읽히지는 않았다. <안녕, 뜨겁게>는 개인적으로는 내 기억에 깊이 남았던 배지영의 귀환같은 작품이었다.
책장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안녕이라는 단어와 뜨겁게라는 의미를.
제이는 그저그렇게 제 목소리 한 번 내지않고 순응하듯 혹은 체념하고 복종하듯 살았다. 학교성적도 그저그랬고 그저그런 대학을 다니고 그저그런 회사에 들어가고 그저그런 존재로 일하고 그저그런 액수의 급여를 겨우 받고 버티고 견디며 살았다. 남들에게 줏대없다고 눈치도 받고 상사의 프락치라며 따돌림도 받으며 갖은 모욕에도 삶이 그러려니하며 살았다. 아무것도 주목받을 것 없는 삶이라 누군가의 동정이라도 고마워할 지경이었다. 제이가 그나마 큰 소리 치는 건 가진 것 없는 집에서 꿈이나 희망없이 땅밟고 사는 것만이 목표인 자신이 얼마나 다행인 존재인가 하는 거였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아버지는 수술을 앞 둔 어느날 병원에서 사라져버렸다. 처음 취업이란걸 한 종부리듯 자신을 부리던 부잣집 딸인 선배의 학원에서도 헛된 약속을 믿고 노예처럼 버텼다. 그런 자신을 딱하게 여기며 따돌리지 않던 유일한 남자 강사와 술김에 연애를 하게 됐지만 등산을 가자고 하더니 제이만 남겨두고 도망쳐 버렸다. 산 속에서 날이 어두워지고 길도 잃어 겨우 남자친구와 가기로 한 산장에 도착한 제이는 남자친구 걱정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곧 자신의 실연을 전해듣게된다.
삶의 모욕은 현실너머의 위안을 찾게 되는 것인지 극단적 현실의 ‘방공호‘가 상상인지 제이에게는 극악한 현실대신 상상의 세계가 찾아온다.
실종된 사람들, 그리움, 모욕, 기대, 미련, 하지 못한 얘기들, 듣지 못한 얘기들은 이제 공상과학의 영역이 된다.
실종된 아버지는 ‘실은‘ 외계인이 납치해 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취재차 만난 설계자를 통해서 맺지 못한 작별 인사의 의미를 찾게 된다. 회사 옆 미스터 리의 공간에서 회사란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땠는지 ‘엿들은 말‘들로 진실을 깨닫는다.
전하지 못하거나 전해받지 못한 작별과 외면하려던 현실들. 섹스숍을 운영하는 미스터 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섹스돌이지만 사실 사랑은 흔들리고 깨지고 식어버리는 그 불안정함이 본질이었는지도 모른다며 고백한다. 섹스돌 미도와의 사랑은 그저 그걸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 방공호에 숨어 끝내지 못한 전쟁같은 걸지도 모른다고.
˝지금 난 방공호에 있는 거야, 상처 받지 않으려고. 그래, 어떤 식으로든 내 곁을 떠나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게 다야. 사랑이란 마음이 떠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거라 의미가 있는 거야. 상처 받을 수도, 상처 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거라 아름다운 거라고. 하지만 방공호 안에선 그냥 목숨만 이어가는거야. 같이 맘 편히 햇빛을 볼 수도 없고 바람을 느낄 수도 없이˝
떠나보내는 것, 잃어버리는 것 모두 두렵기만 한 관계의 과정들이다. 작별을 외면한다고 가슴앓이를 건너 뛰게하지도 않을텐데 왜 그렇게 많은 작별의 말들을 껴안고만 지내왔을까.
안녕이라고 떠나보내는 온도가 왜 그렇게 무섭고 차갑다고만 느끼는걸까.
시리고 차가운, 쓸쓸한 한 해의 끝, 겨울밤이다. 계절도 시간도 이렇게 간다. 사람도 감정도 삶도 모두 다 그런거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실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처음 만나고 마음에 들일때도 또 떠나고 보내고 잊고 지울때도 관계 안에서도 관계 밖으로 밀려 나서도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 메우지 못하는 마음 속의 깊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
어떻게 뜨겁게 이런 감정들에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
책장을 덮고 오랫동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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