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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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하고 가난하게 살아온 크리스티네.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우체국에서 일을 한다. 하루종일 고되게 일을 하고 퇴근 후 침대 외에는 앉을 자리조차 없는 집에서 해진 옷을 기우는 삶이다. 그런 그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망명해 부자가 된 수상쩍은 이모의 갑작스런 초대를 받고, 잠시 호화로운 휴가를 보내게 된다. 처음엔 차림새에 주눅이 들어 호텔 직원 앞에서 고개도 못 들었던 그는 이모의 도움으로 차려입은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다만, 반짝이는 순간에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더니 결국 과거가 들통날까봐 겁이 난 이모까지 합세하여 그를 현실로 서둘러 돌려보내고. 크리스티네의 절망감은 문제의 그 휴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보다 훨씬 짙어진다. 이전까지는 단순한 무력감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분노까지 가세한, 숨겨지지 않는 절망감이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환한 빛을 보고 눈이 먼 사람같다.

전후 유럽의 빈부격차, 차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 간극을 오고가는 크리스티네는 절대적 빈곤이 어떻게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지, 상대적 박탈감이 인간을 어떻게 불행하게 만드는 지 두 가지를 모두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치를 피해 망명한 남미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유고 더미에서 나온 소설이라고 한다. 글을 빠르게 쓰기로 유명한 그가 가장 오랜 기간 쓴 작품이라는데, 읽어보니 이 작품은 미완의 상태인 것이 분명해보인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죽기로 결심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일생일대의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크리스티네는 결국 성공해서 이모처럼 살게 되었을까.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소설을 해피앤딩으로 끝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덮고 나서도 두 가지의 아쉬움 때문에 한참 마음이 저릿했다.

“여자가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을 남자는 아주 명료하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고 싶지는 않다고, 단지 내 권리를 찾고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라고. 다른 이들이 따뜻한 방 안에 있는 동안 추운 바깥에서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서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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