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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 피아니즘의 황홀경 ㅣ 현대 예술의 거장
피터 F. 오스트왈드 지음, 한경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평점 :
나는 음악에 문외한이고 듣는 귀도 무딘 편이지만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만큼은 분명히 구별해낼 수 있다. 기묘한 허밍이 하나의 표식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 음도 뭉그러뜨리지 않고 또렷하게 귀에 꽂히는 명료함 때문이다. 그 명료함은 어떤 날에는 신경질적으로, 또 어떤 날에는 맑게 들렸고 한동안은 1981년 버전 변주 1을 아침 알람으로 설정해 두기도 했다.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늘 함께하던 낡은 의자, 그로 인해 굽은 등.
글렌 굴드를 떠올릴 때 따라붙는 기이한 이미지들은, 어쩐지 천재 예술가라면 으레 갖추어야 할 기벽처럼 여겨지곤 했다.
평생 건강 염려에서 비롯된 심인성 질환에 시달리며 한여름에도 겨울 외투를 입고 다녔고 청중을 견디지 못해 이른 나이에 무대에서 물러나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던 스튜디오로 숨어든 사람.
이런 삶은 전기로 쓰기 좋은 소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굴드는 생전에 글, 일기, 인터뷰, 방송 출연, 다큐멘터리 등 방대한 기록을 남겼고, 그만큼 많은 전기와 연구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마냥 괴짜 피아니스트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인물이다.
글렌 굴드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들의 총합이 있다면, 아마도 이 전기가 아닐까. 이 책은 1997년, 오랜 세월 굴드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인이자 깊은 우정을 나눈 피터 F. 오스트왈드 박사가 쓴 전기다. 저자는 굴드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이 기묘한 예술가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한편으로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말을 들어줘. 그러면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는 요구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를 유지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난 혼자 있고 싶으니 방해하거나 상관하지 말아 줘’라는 이중적인 요구를 하고 있었다.“ p.74
이 첫 만남에서 이미 예고되었듯, 오스트왈드 박사는 굴드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예술가의 친구로 살아가게 된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지만 굴드를 직접 진료한 적은 없으며, 끝까지 친구이자 관찰자의 위치를 지킨다. 덕분에 이 전기는 임상적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관대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굴드를 바라본다.
또한 음악적 조예가 깊은 저자는 음악적 이해를 바탕으로 굴드의 연주와 철학을 해석하고,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그의 기벽과 질환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상세히 풀어낸다. 심야마다 이어지던 굴드의 장황한 전화 통화 같은 사적인 일화들은 이 전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이 책은 굴드의 천재성을 신격화하는 대신, 가까운 친구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조망한다. 그의 문제점들마저도 굴드가 추구한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퍼즐 조각처럼 읽힌다.
굴드에게 스튜디오는 청중 대신 선택한 피난처였다. 무균실처럼 고요한 그 공간에서 그는 방송과 녹음이라는 매체가 지닌 가능성을 일찍이 꿰뚫어 보았다. 완벽주의 성향의 그에게 스튜디오는, 실황 연주의 수많은 변수를 피해 이상적인 굴드 사운드를 빚어낼 수 있는 공작소였다. 말년의 굴드는 피아니스트라기보다 라디오 제작자이자 영상물 제작자로서 피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른 은둔의 시기를 거치며 굴드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피아노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뚜렷한 대비, 보통 이상으로 빠르거나 느린 템포, 생동감 넘치는 뛰어난 리듬감, 지극히 투명한 터치, 대위법적 특징을 누구보다도 잘 살려내는 능력, 그리고 음악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끌어내는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p.223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굴드만의 연주가 형성되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견고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천재성뿐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다치기 쉬운 사람인지도 알아주길 바랐다.“ p.225
굴드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할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음악가의 책을 쓰는 거야.“
글렌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까? p.641
전기의 제목처럼, 황홀경과 비극 사이를 오간 글렌 굴드는 이 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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