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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틱낫한의 일기 - 나를 만나는 길 1962-1966
틱낫한 지음, 권선아 옮김 / 김영사 / 2023년 1월
평점 :
번잡한 연초에 만난 틱낫한 스님의 글이 처음에 잘 안 읽혔다. 분명 쉬운 문체인데 왜 잘 안 읽혔을까. 베트남에 대한 역사와 시대적 상황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의 젊은 나날 분투하던 일기가 와닿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차츰차츰 맑은 글을 따라가다 보니 닫혀 있던 마음의 눈이 떠지고, 고뇌하던 젊은 수행자의 깊은 생각과 감정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아름다운 글을 읽는 데에 적응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틱낫한은 세계에서 존경받는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16세에 스님이 된 그는 불안정하던 조국 베트남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이 책의 전반부는 그가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과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후반부에는 베트남에서 반전 평화운동을 하다가 정치 탄압을 받아 조국을 떠나기 전까지의 일기를 엮었다. 이 일기를 쓰던 시기에 그의 조국 베트남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고 그의 친구들과 뜻과 마음을 바쳐 세운 사원도 무너져버렸다.
책의 원제 ‘프엉보이(Phuong Boi, 향기로운 종려나무 잎)’는 1957년 틱낫한이 베트남 중부에 일군 사원 이름이다. 불안한 시기에 머나먼 이국에서 그의 마음은 늘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애탔으며 그가 세운 사원 ‘프엉보이’에 향해 있었다. 프엉보이는 젊은 틱낫한 사상이 응축된 꿈이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정치 탄압으로 이어지고 39년 동안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학교에 의해 종교를 접한 경험은 많다. 그러나 특정 종교에 헌신하며 진정한 믿음을 가져본 적은 없다. 특히 불교의 정신은 도달하기 너무나 어려운 경지의 종교로 여겨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같은 유심론적 삶의 태도에도 감응 받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 아니면 잘 믿지 못하는 성향이 종교를 갖기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도 정답은 모르지만, ‘자기 안의 평화, 세상의 평화’를 전하는 틱낫한 스님이 일평생 헌신한 삶의 단편을 읽으며 결국 모든 종교는 같은 곳을 향하지 않는가 한다. 그 세계에는 전쟁과 폭력, 미움, 욕망과 질투가 없으며 자비와 평화만이 존재한다. 자기만의 신화를 이루도록 한다고.
젊은 틱낫한이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화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메시지와도 동일했다. 알을 깨고 나아가는 과정을 그는 “파괴에 파괴를 거듭 경험했다’고 표현했다.
📝때때로 두 개의 상반된 자아, 즉 사회가 강요하는 ‘거짓 자아’와 내가 ‘진정한 자아’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갇혀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둘을 헛갈리고, 사회가 강요한 틀을 진정한 자아라고 추정하는가. 두 자아 사이의 싸움이 평화로운 화해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고, 마음은 전쟁터가 된다. (중략) 나는 내가 ‘나’라고 여기던 실체가 사실은 허구라는 것을 보았다. 나의 참된 본성은 훨씬 더 진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추하고 더 아름다웠다.
p.101
📝만약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계속 살 수 있겠는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매 순간 죽어야만 한다. 우리는 삶을 가능하게 만든 폭풍우 속에서 거듭거듭 소멸되어야 한다.p.105
📝오늘날의 사람들은 쉬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주의를 빼앗는 셀 수 없이 많은 것으로 자유시간을 채운다. 사람들은 몇분간의 여유 시간도 참지 못한다. TV를 켜거나 신문을 집어 들고는, 그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광고라도 읽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계속해서 보고 들을 것, 또는 말할 것이 있어야만 한다. 그 행동은 모두 내면의 공허가 그 무서운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p.150~151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빗자루로 쓸고, 물을 길어 나르고, 장작을 패는 동안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깊이 머물 수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지 않는다. 깨끗한 접시를 갖기 위해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요리를 하기 위해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한다. 목적은 이 허드렛일을 빨리 해치우고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p.153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늘 꾸려지는 온갖 종교 모임, 사교 모임을 보라. 교회와 사원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남녀가 함께 만나 모임이나 파티를 계획하는 장소가 되었다. 교회나 사원에 가는 것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자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중략)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들은 계속 똑같은 껍질 안에서 맴돈다. 공허한 사교 모임은 그 껍질의 표현일 뿐이다. p.194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