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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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 의회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을 상대로 탄핵 소추안을 발의한다. 가결이 확실시되자 닉슨은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 자리에서 사임 의사를 밝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 반대 의사를 표명한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벌인 조직적 권력 남용으로 인한 정치 스캔들을 뜻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익숙하진 않지만 미국 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석권한 작가이자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필립 로스의 소설 <우리 패거리>는 정치 풍자 소설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보듯 실제 정치판의 행태를 반영한 조롱과 풍자로 가득하다. 이런 세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기에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설은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자진사퇴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연설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대통령을 사기꾼이라는 의미의 트리키(Tricky)로, 국방장관은 돼지기름을 뜻하는 라드(Lard)로 불린다. 이들은 미식축구 광팬인 대통령을 따라 미식축구선수 복장을 한 채로 지하 방탄룸에 모여 미식축구 작전회의를 하듯 국무회의를 진행한다. 황당하기만 한 대통령의 자기중심적 언행에도 충성심을 드러내는 당시 내각 인사들의 무능하고 이기적인 행태는 상징적인 이름과 발언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나라가 다시 위대해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대량의 무지'라고 생각하는 트리키 대통령은 본인의 재선을 위해 태아에게까지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한 개인의 목숨은 가벼이 여긴다. 사익을 위해 국가 권력을 이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지보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의 발언은 실소를 유발하게 하며 아마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한다.


<우리 패거리>는 실제로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발하기 전에 발표되었는데 소설 속 스토리는 이후 벌어질 실제 상황과 유사해 마치 필립 로스 예언처럼 다가온다. 생명을 담보로 한 '낙태'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 문제로 비화되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 국민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으며 이런 행태는 한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추종자들과 그들을 믿고 뻔뻔해 보일 만큼 당당한 권력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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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멜론 슈거에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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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내용도 아닌 표지에 이끌려 눈길이 간 책은 오랜만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환상소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날마다 다른 빛깔의 태양이 뜨는 마을 '아이디아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환상문학이라고 하면 구름에 붕 뜬 기분으로 읽는 난해한 스토리가 먼저 떠올라 그동안 자주 접하진 않았다. 하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기점으로 이 장르의 소설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문명과 기술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만큼 고도로 발달된 편리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때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과거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느낀다. 이 소설이 쓰인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도 그러했다. 당시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했던 반체제의 시대로 비인간적인 물질문명에 밀려난 목가주의를 탐색하고 추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할까?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으로는 실패로 평가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당시 그들이 그리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만나 잊혀진 것들의 소중함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달콤한 워터멜론으로 둘러싸인 마을 아이디아뜨에선 날마다 새로운 빛깔의 태양이 뜬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나는 태양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색의 워터멜론을 한껏 키우고 있다. 월요일엔 붉은색, 화요일은 황금색, 수요일은 회색, 목요일은 소리 없는 검은색, 금요일은 하얀색, 토요일은 푸른색, 일요일은 갈색의 달콤한 워터멜론을 수확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죽음과 폐허의 색이 짙은 ‘잊힌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소도 등장하고 폭력적인 인물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정해진 이름이 없는 주인공, 그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달라는 작중 화자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신적으로는 늘 풍요로움을 추구해야만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합성어 i + DEATH, 역자는 idea + death의 합성어로 읽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려 '아이디아뜨'로 번역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이데스'로 읽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들이 바라는 이상 속에도 이미 죽음이 깃들어 있을 테지만 1인칭 단수 주격 대명사 I를 수많은 개개인으로서의 '나', 즉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던 소설 <워터멜론 슈거에서> 속 모든 등장인물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내면을 반영해 주는 듯했다.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나의 모습들을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거리감을 두고 지켜볼 수 있었다. 실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삶처럼 자칫 허무주의로 마무리될 수도 있지만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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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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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하얀 마물의 탑>에 이은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붉은 옷의 어둠>. 작중 시점은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 사이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전작 두 편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탄광과 등대에 이은 하야타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지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광기에 가까웠던 제국주의 승전 신화는 무너지고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된다. 만주 건국대학에 다니며 꿈을 키우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전쟁의 폐해를 몸소 겪으며 환멸을 느끼지만 동시에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결의와 함께 길을 떠난다.


방랑자로 여기저기 떠돌며 아마추어 탐정 생활을 이어가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무리 짓던 무렵 대학시절의 절친 구마가이 신이치의 연락을 받는다. '붉은 미로'라 불리는 암시장 내에 출몰하는 괴인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 달라는 것.


자신의 행로를 이미 정해둔 터라 얼굴만 비추고 헤어지려던 모토로이 하야타의 결심과는 달리 도쿄의 거리는 그의 결심을 뒤바꿀 만큼 변해있었다. 전쟁 시기 동안 거듭된 공습으로 초토화되었을 거리에 거대한 암시장이 생겨나 있었다.


생존을 위한 터전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사건과 임산부 피습 사건으로 공포의 기운아 가득한 암시장 내에서 하야타는 이번에도 무사히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을지. 미쓰다 신조 특유의 섬세한 배경 묘사 덕에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 상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미스터리 추리소설로서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시대 상황 묘사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암시장이 생기기까지의 과정, 미군의 주둔과 함께 시작된 일본 정부의 공창제도와 더불어 가장 큰 피해자였던 고아로 자란 아이들까지 전쟁의 폐해는 여느 나라에서든 비슷한 모습이었다.


우리의 현대사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 더욱 몰입해 읽었던 <붉은 옷의 어둠> 앞서 읽은 <검은 얼굴의 여우>와 더불어 미쓰다 신조의 최애 작품이 될 듯하다. 더불어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하야타의 다음 행선지도 정해졌다고 하니 네 번째 작품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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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이이지마 나미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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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의 길모퉁이에 작은 식당이 오픈했다. 이곳의 주인 사치에 역시 자그마한 체구지만 당찬 성격의 그녀는 가게 이름을 '카모메'라 붙인다. 카모메는 갈매기를 뜻하는 일본어로 헬싱키의 오동통한 갈매기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던 사치에는 식당 이름 역시 그리 지은 것이다.


주인의 포부와는 달리 한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던 카모메 식당이 하나 둘 늘어가는 손님들로 활기를 더해가며 소박하지만 힐링이 되었던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며 영상에 보이는 것과 꼭 닮은 주먹밥이 먹고 싶어 백화점 식품 코너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카모메 식당>에 등장했던 주먹밥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미의 솜씨였는데 그는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심야식당> <남극의 셰프> <바닷마을 다이어리> <빵과 수프, 고양이가 함께하기 좋은 날> 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푸드 스타일링을 맡았다.


한국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속 동화 속 눈처럼 내리는 팝콘도 이이지마 나미의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와 함께 일본 가정식의 매력을 널리 알린 푸드 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미의 에세이집으로 허기진 배는 물론 마음까지 채워주는 따스하고도 소박한 음식 레시피가 담겨 있다. 질리지 않는 주먹밥 레시피와 더불어 심야식당 속 따스한 된장국, 의외로 맛있어 놀랐던 바나나 튀김까지 몇몇 레시피는 직접 따라 해보기도 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요리 레시피가 공유되고 그것을 따라 만드는 콘텐츠까지 유행시킬 수 있는 힘은 음식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음식을 보며 그 음식의 온도와 식감, 향, 맛을 상상하고 오감을 통해 기억하곤 한다.


영상의 매력을 배가 시키는 요소는 무한하지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 애쓴 이이지마 나미 역할을 높이 사고 싶다. 덕분에 그녀의 손길이 담긴 힐링 영화 들을 여전히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지마'는 밥 섬, '나미'는 핀란드어로 맛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름까지 맛있는 작가의 따스하고도 소박한 에세이는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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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최재봉 지음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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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문 한 켠 문학 관련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어떤 책을 추천하는 글이었는데 짧게 인용된 글귀가 당시 힘들던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듯해 그 책을 바로 사러 갔던 기억이 난다. 이후 문학뿐 아니라 문화 관련 기사에서도 그의 글을 접할 수 있었는데 기자의 이름 또한 특이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30여 년간 문학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문학을 탐구하던 최재봉 기자는 정년을 앞두고 신문사의 제안으로 칼럼 연재를 한다. <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에는 오랜 세월 문학을 탐닉하며 탐문했던 그의 결실이 담겨 있다. 문학을 통해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과 더불어 문학 이면의 비밀을 파고든 글들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진 유명 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의 제목에 얽힌 에피소드가 가장 눈에 띈다. 총의 노래가 될 뻔했던 김훈의 '하얼빈', '살인 당나귀'로 남을 뻔한 박범신의 '은교', 원제는 '이웃집 혁명전사'였던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해당 작품들이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문학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며 직접 취재하고 연구한 만큼 그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그러면서도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을 잘 벼려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그저 수용하는 것이 아닌 비판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덕분에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이 또다시 늘어났다. 문학에 애정이 깊고 직업인으로서도 오랜 시간 성실했던 그였기에 쓸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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