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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멜론 슈거에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평점 :
제목도 내용도 아닌 표지에 이끌려 눈길이 간 책은 오랜만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환상소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날마다 다른 빛깔의 태양이 뜨는 마을 '아이디아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환상문학이라고 하면 구름에 붕 뜬 기분으로 읽는 난해한 스토리가 먼저 떠올라 그동안 자주 접하진 않았다. 하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기점으로 이 장르의 소설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문명과 기술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만큼 고도로 발달된 편리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때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과거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느낀다. 이 소설이 쓰인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도 그러했다. 당시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했던 반체제의 시대로 비인간적인 물질문명에 밀려난 목가주의를 탐색하고 추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할까?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으로는 실패로 평가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당시 그들이 그리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만나 잊혀진 것들의 소중함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달콤한 워터멜론으로 둘러싸인 마을 아이디아뜨에선 날마다 새로운 빛깔의 태양이 뜬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나는 태양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색의 워터멜론을 한껏 키우고 있다. 월요일엔 붉은색, 화요일은 황금색, 수요일은 회색, 목요일은 소리 없는 검은색, 금요일은 하얀색, 토요일은 푸른색, 일요일은 갈색의 달콤한 워터멜론을 수확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죽음과 폐허의 색이 짙은 ‘잊힌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소도 등장하고 폭력적인 인물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정해진 이름이 없는 주인공, 그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달라는 작중 화자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신적으로는 늘 풍요로움을 추구해야만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합성어 i + DEATH, 역자는 idea + death의 합성어로 읽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려 '아이디아뜨'로 번역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이데스'로 읽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들이 바라는 이상 속에도 이미 죽음이 깃들어 있을 테지만 1인칭 단수 주격 대명사 I를 수많은 개개인으로서의 '나', 즉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던 소설 <워터멜론 슈거에서> 속 모든 등장인물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내면을 반영해 주는 듯했다.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나의 모습들을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거리감을 두고 지켜볼 수 있었다. 실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삶처럼 자칫 허무주의로 마무리될 수도 있지만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