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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쪽으로
이저벨라 트리 지음, 박우정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9월
평점 :

한정된 공간에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 기존의 것은 밀려나고 만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 위의 도시 문명과 자연의 관계 또한 그러한 것 같다. 이는 어디에나 적용되는 흐름이지만 일상에 지칠 때마다 자연을 찾게 되는 걸 보면 이 흐름의 방향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자연에서 받는 치유의 힘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요즘 슬프게도 자연은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언어와 마음에도 반영돼 옥스퍼드 주니어 사전에서는 자연과 관련된 용어들이 매년 삭제되고 있다고 한다.
아몬드, 블랙베리, 도토리, 클로버, 왜가리, 청어, 종달새, 가재 등이 전부 삭제되었고, 자연스레 아이들은 자연 훼손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비단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역시 어린 시절 친근하게 만날 수 있었던 동식물들을 못 본 지 오래되었고 기억 속에 그들은 잊혀 가고 있다.

통념을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용기, 인내, 디테일의 힘
많은 이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라 여기는 중에 직접 실행에 나선 이가 있다. 지구 반대편 섬나라 영국 웨스트서식주에 살고 있는 이저벨라 트리는 환경보호론자인 남편 찰리와 함께 적자 상태였던 그들의 사유지 농지에서 재야생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들이 오래도록 심혈을 기울인 '넵 황무지 프로젝트'의 시작은 기울어만 가는 농촌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바로잡아 보고자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20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땅은 황무지에서 다시 활발히 기능하는 생태계가 되었고 야생생물의 수가 급증하면서 수많은 멸종 위기 종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작가이자 여행 저널리스트, 넵 황무지 프로젝트 관리자인 이저벨라의 흥미진진한 글솜씨 덕에 함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그들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 갔다. 기존 통념을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용기, 고착 상태에서도 이어지는 인내, 세부사항에 대한 꼼꼼한 조사까지 사람에 대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세웠다 허물었다 다시 세우는 작업의 무한 반복
이저벨라 부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자신들이 일군 자산과 갖은 대출 그리고 육체노동까지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 현대식 농기구를 이용해 경작토를 만들고 제초제를 뿌리고 씨앗을 심고 비료를 주고 베는 작업을 매해 반복하며 농사를 지어왔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덫에 걸렸다고 생각한 부부는 우연한 계기로 네덜란드의 재야생화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서 자연이 이끌어 가도록 놔두는 실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영국에서는 선례도 없었기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고 이 프로젝트 또한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다.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한 그들의 시도는 감사하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들였다. 경작지였다가 재야생화된 땅에는 그들이 비용을 들여 도입한 동물들이 적응하며 지내는 동시에 시급히 보호해야 하는 멸종 위기종들이 스스로 찾아오면서 새로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라지는 단어들 그리고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힘
20여 년간 진행 중인 넵 재야생화 프로젝트는 타당성 조사, 난해한 정의, 보건과 안전상의 두려움 같은 이유로 영국 당국으로부터 거부를 당하기도 하고,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 중도에 멈추기도 하며 수많은 장애물을 헤치며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은 농부의 땀과 핏방울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농부의 마음은 하늘도 알아줘야 할 만큼 고귀한 것이라는 선조들의 가르침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본듯한 야생 일지 같은 이 책은 땅에 대한 통념을 바꿔주고 있었다.
아직 현재진행형이기에 결과는 알 수 없다. 그치만 사라져가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되돌아오고, 90% 이상 개체 수가 줄어들며 이번 세기 내에 멸종할 것으로 예상되던 멧비둘기와 나이팅게일 등 작고 여린 새들이 그들의 땅에 찾아오는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환경이 오염되면서 오렌지 한 알, 사과 한 알에 담긴 영양분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해 급격히 떨어졌다. 과거엔 한 알로 채울 수 있는 비타민을 요즘엔 8알 이상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멀어져 가는 자연을 붙잡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는 이들이 남긴 500여 페이지의 기록 <야생 쪽으로>.
작고 여린 동식물을 비롯해 맹금류는 물론이고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환경보호, 기후 위기까지 거시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스며있는 개인적이기도 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