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제쳐 두었던 필사 노트를 다시 펼쳐 보았다. 눈에 띄게 많은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시의 주인공은 바로 정호승 시인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슬픔이 기쁨에게> 등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명시를 세상에 선보였다.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이하여 펴낸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시가 있는 산문집으로 시를 감상하며 동시에 어떻게 시인의 창작 당시의 사연을 함께 들을 수 있다. 잔잔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서정시를 주로 쓰는 정호승 시인의 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워 시와 친하지 않더라도 그의 시를 만나면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시와 산문은 서로 다르면서도 한 몸을 이루기에 산문이 시가 될 때도 있고 시가 산문이 될 때도 있다는 그의 말이 진정으로 이해된다.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펼쳐 시 한 편, 그와 관련된 산문 한 편을 읽다 보면 그동안 미처 몰랐던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음을 물론 시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정호승 시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외치지만 이번엔 이 시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에서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야겠다예전에 이 시를 읽고 필사를 하며 그저 한 사람의 감상을 담은 서정시로만 생각했는데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시대상을 담고 있는 참여시이자 민중시였음을 알게 되었다. 참여성과 민중성을 지향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서정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시인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그의 시에 감탄하게 된다.삶 그리고 사랑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시는 구슬프지만 아름답다. 등단 50년이 된 그의 시집은 출간 몇 십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증쇄되고 있다. 이는 그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란 반증이 아닐까. 시구 속에 담긴 의미를 미처알지 못하고도 시의 매력에 빠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평소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칠 법한 것들을 세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그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의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와 인생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