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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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살해당했어요.
그게 이 사건의 유일한 진실이에요.“


파울로 코엘료 작품 이후로 오래간만에 남미 소설을 만났다. 아르헨티나 출신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해외 문단에서는 이미 유명한 작가였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로 독일 문학상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조만간 넷플릭스에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공개될 예정이라고 해 기대를 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엘레나가 딸 리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숨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드러나는 진실이 굉장히 무겁게 다가와 때론 숨이 막히기도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밤, 엘레나의 딸 리타는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경찰이 바로 수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타살 증거가 없어 이내 자살로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시킨다. 하지만 엘레나는 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리타는 어릴 적부터 번개를 무서워했다. 성당 십자가는 "우리 마을의 피뢰침이란다."라는 아버지 안토니오의 말을 듣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성당 근처에는 얼씬도 않던 리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후안 신부의 배려로 성당 소속 학교에서 근무하지만 여전히 번개 치는 날에는 성당을 피했던 것이다.


엘레나는 리타가 죽던 날 갑자기 그녀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을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인을 비롯해 신부, 담당 경찰에게 계속 호소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엘레나는 결국 살인범을 찾기 위해 혼자 수사하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에서는 말로만 듣던 파킨슨병의 증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파킨슨병은 중추신경계에서 도파민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아 발생하는 질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뇌가 명령을 내려도 신체 기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우울증, 불안, 치매 증상까지 겪게 된다.


고개를 숙인 채로 늘 아기처럼 침을 흘리며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어려운 엘레나는 대신 범인을 찾아줄 사람을 찾는다. 기억을 더듬어 이십 년 전 모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은 이사벨을 떠올린 엘레나.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사벨이 여전히 그곳에 사는지 확신이 없었지만 엘레나는 알약의 힘을 빌려 한 걸음씩 내딛는다. 지나가야 할 곳을 반복해 되뇌며 기차와 택시를 타고 그녀를 찾아간다. 다행히 이사벨을 만났지만 의외의 반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엘레나는 지난 시간 믿어왔던 스스로의 가치관에 물음을 제기한다.


엘레나와 리타는 여느 모녀지간처럼 서로 다투고 생채기를 내면서도 늘 함께였다. 엘레나는 딸에 대해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으며 다소 거칠지만 그 또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수사를 거듭해 가며 엘레나는 자기 딸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레나가 모성애라고 여긴 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자신도 모른 채 주입되어 있던 사회규범을 딸에게도 강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성 역할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지 선대 여성이 살아온 삶의 경험과 지혜라는 이름으로 후대 여성에게 강요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양육, 돌봄과 같은 문제는 객관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자연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고 선한 일이라 믿었건만 누군가에겐 죽음과 맞바꿀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인간이라는 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굳어가는 몸에 갇힌 엘레나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잔인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처음에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왠지 모를 배신감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미래에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이미 비슷한 문제로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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