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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 -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모제노센 세상
찰스 만 지음, 최희숙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2월
평점 :
벌써 1년이 조금 넘게 흘렀다. 일을 그만 두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멕시코에 반 년 정도 체류한 지 말이다. 당초 계획은 그 반 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 주요 지역을 모두 둘러 볼 예정이었으나, '백팩커들의 늪'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필자도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그 반 년을 물 새 듯 모두 흘러버렸다.
멕시코라는 나라는 그 거대한 크기 만큼이나 하나의 단어로 묶어 말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종이다. 멕시코와 벨리즈, 과테말라의 국경이 만나는 체투말에서 나에게 숙소를 제공해줬던 프레디라는 친구는 한국인이 흔히 구분하는 인종과 민족의 범주로는 그 경계가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그의 조부는 아내와 함께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멕시코로 이주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칸쿤 부근에서 또 다른 이태리 출신 이민자와 현지인 혼혈 딸을 만나 결혼해 그를 낳았다. 고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운 마얀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캘리포니아 롤을 스시로 부르며 자신의 번쩍이는 금발을 다듬기를 좋아했던 프레디는, 나에게 복잡다산한 멕시코의 근현대사를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듯 했다.
<1493>의 저자 찰스 만은 라틴 아메리카가 보여주는 이러한 혼합에 주목한다. 인종부터 시작해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대표되는 동식물, 포토시의 은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1493년 시작된 콜론(저자는 콜롬버스가 생전에 스스로 개명해 불렸던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콜럼버스를 부른다)의 여정이 단순한 지리적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창조였음을 강조한다. 그 이전까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하고 양태된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이 광범위하게 교류되고 토착화를 시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부제처럼 이를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모제노센' 세상이라 부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전 지구가 글로벌 교역망으로 연결됨으로써 촉발된 변화를 광범위하게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렌즈는 생태학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참신한 주장 몇 가지를 전개한다.
대표적인 것이 17세기 후반에 절정기를 맞았던 소빙하기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유럽 문명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이 본격화 된 후 소빙하기가 절정을 맞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주장한다. 화전으로 경작지를 일구던 북미 대륙 토착인들의 개간 방식이 유럽인들의 진출로 불가능해짐에 따라, 수목이 개걸스럽게 북미 초원 지대를 뒤덮었고 이에 따라 북미 산림 지대의 이산화탄소 흡수가 과도해짐으로써 빙하기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미국의 북부가 임금 노동, 남부가 노예 노동에 의존하게 된 것이 말라리아로 대표되는 열대 지방의 질병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점도 흥미롭다. 남북 전쟁 시기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인공적인 경계선이 공교롭게도 말라리아의 북방 한계선과 거의 일치하며, 북부에서 자리 잡았던 유럽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계약 이민 제도가 남부에선 유럽인들이 내성을 가지지 못 했던 질병들로 인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표면적으로 계약 이민자이자 임금 노동자였던 유럽인들에 비해 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각종 열대병에 내성을 가졌던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가 생태학의 관점에서 지적하는 역사의 이면은 많은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필자는 저자가 다루는 시대와 무대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로 대변되는 제도 경제학 책들을 통해 많이 받아들였다. 앵글로 색슨과 라틴 문화권으로 양분된 아메리카 대륙이 후에 보여줬던 극명한 발전의 차이는 남북한 만큼이나 그들이 다루기에 흥미로운 소재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술은 대게 각 문화권과 국가가 가지고 있던 시스템과 소유권으로 대표되는 제도로 천착되기 때문에, <1493>이 보여주는 생태학적 서술은 그러한 제도 경제학자들의 서술이 어떤 환경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보완재가 된다.
더불어 저자는 기존의 저작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했던 대서양 문화권의 상호 교류를 강조한다. 지배/피지배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이분법, 하향식 역사 서술이 아니라 소수의 유럽인들이 다수의 인디언, 아프리카 노예 심지어 태평양을 건너 온 아시아인들이 함께 창조해낸 세계를 서술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는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바라보는 프레젠티즘(Presentism)에 대한 경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과거를 일면화하고 도식적인 논리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를 표한다. 노예 노동과 무역에 대한 당시의 관점부터 남미의 식민지 경영이 무수히 많은 문화권과 집단의 이해 관계, 수많은 대리인을 낳은 것에 1차 사료와 자신의 취재를 덧붙여 꽤나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전문 학자가 서술한 책이 아님에도 이 책의 참고 문헌만 66페이지에 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 역으로 분한 로빈 윌리엄스는 모든 책을 기억하고 있는 듯한 천재인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내가 너에게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댈껄? 미켈란 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그에 대해 잘 알거야. 그의 걸작품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본능까지도 알거야. 그치?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내음이 어떤지는 모를껄?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적이 없을테니까."
역사 서술이 텍스트 위에서만 이루어질 때 가질 수 있는 함정은 역사의 실존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현장감을 망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저술을 위한 작가의 발품 팔이가 책 곳곳에서 디테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이들이 역사상 최초로 한 데 모였던 필리핀의 마하우하우를 직접 보기 위해 반군 게릴라들이 점령한 땅을 보트 하나에 의지한 채 탐험하는가 하면, 농장주와 노예들이 끝없는 벌였던 반목과 전투의 현장들을 답사하기 위해 남미의 진창을 여기저기 내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서술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콜론을 시작으로 인류가 창조해 낸 현재에 대한 질문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남미에서 전래된 구황작물들이 아일랜드에서 푸른 잎을 피우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전파된 커피와 고무가 브라질에서 익어가는 동안, 400여년 전 아프리카 출신 탈출 노예들이 건설한 퀼롬보는 여전히 살바도르의 빈민촌으로 남아 도시와 융합되지 못 하고 필리핀 북부 사람들은 여전히 레가스피가 살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생활 수준을 수상 가옥에서 영위하고 있다.
역사의 굴레를 여전히 짐으로 짊어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서술로 마무리되는 <1493>은 이 책이 과거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질문임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