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필립 한든 지음, 김철호 옮김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긴 여정 속에서 마주하는 자유로움과 평화,《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꼭 챙겨야 할 무언가를 빠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넘치도록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해왔다.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물건을 찾는 데에 실패한 날에는 그 물건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임에도 하루 종일 아쉬움이 남는 반면, 이것 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온 날에는 어깨가 조금 아플 지언정 기분이 나쁠 일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로 분주한 요즘도 이런 습관은 변함 없이 이어진다. 할 일은 정해져 있고 이를 다 마치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늘 계획한 바의 1.5배 정도는 들고 다닌다. 



이렇듯 채우기를 거듭하는 나날은 사실 귀찮고 힘들 때가 많다. 넘치게 담아내도 한 두 가지씩 놓치는 경우가 더러 생기기도 한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회의하던 차에 만난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은 선물과도 같았다. 처음 아무런 정보 없이 제목을 접하고는 막연히 여행에 관한 도서일 것이라 추측했다. 구력이 상당한 배낭여행가가 자신의 여행길을 함께 한 물품들을 소개하는 책이겠거니 했다. 마침 8월 즈음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지라 여러 모로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막상 첫 페이지를 넘겨 보니 그간의 추측이 공상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가볍게 떠나기'를 이야기하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자아낸다. 짐 없는 여행, 한 장 나뭇잎처럼 단아하게 걸어가는 인생길은 책을 통해 녹여내려는 메시지를 함축한다. 일본 여행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큰 자산이 될 수 있을테니, 또 그 자체가 삶의 일부이기에 나의 귀여운(?) 예상이 저자의 의도와 완전 동떨어진 것이라 보긴 어렵겠지만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갈 생각이었기에 그 괴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사카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여행 계획이 취소되면서 이 책에 좀더 몰입할 수 있는 조성되었다. 얇은 두께, 가득 찬 여백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동화 같은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우리는 누구나 여행을 한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한 날에서 다른 날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 책은 총 41명의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을 담고 있다. 선정된 인물들 중에는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도 있고,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는 인물도 있다. 마르셀 뒤샹,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이들은 전자에 해당하고 조시마 신부, 가모노 초메이 등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만을 수록했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 보다 쉬웠을 것이고, 또 이야기를 꾸려가기 편했을지 모르지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긴 어려웠을 테다. 그렇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여행자들을 담아내면서 책의 구성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소지품 목록을 제시하기 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을 수록하여 이해도와 설득력을 높였고, 이들 여행자들이 실천해 온 비움의 미학과 자유로운 삶을 어떠한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간단한 소지품들의 나열이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필통, 노트북, 종이 더미 등도 작가의 손을 거치면 근사한 시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소지품을 모아 출판할 생각을 한 것도 신기하고, 이것들이 문학성을 지니도록 적절히 배치한 작업은 대단하게도 느껴진다. 특히 각각의 목록들은 정돈된 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소유자의 아이덴티티를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조시마 신부의 목록은 그가 검소한 삶 속에서 신앙의 길에 몰두해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레이먼드 카버의 할 일 목록은 그의 취향이나 성향, 천진난만한 면모까지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섬세한 작업은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구성을 유지하기에 지루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페이지에는 소소한 위트와 묵직한 한 방이 있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북극제비갈매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뜬금 없이 동물이 등장한 것도 특이한데 그 이름까지 생경한 지라 궁금증은 더해갔다. 생각해보니 동물들도 꼭 챙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마음을 너무 몰라준 것 같기도 했다. 기대감을 안고 페이지를 넘기니 예상치 못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35,000킬로미터 대장정에 나서는 북극제비갈매기는 그저 혈혈단신으로 비행에 집중할 뿐이다. 먼 길을 떠나는 존재는 당연히 커다란 짐덩어리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채움에 주력한 관성에 기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편협함, 그리고 작은 장치로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 저자의 센스에 다시금 놀라는 순간이었다.







고작 몇 시간 집을 떠날 때에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던 짐들이 문득 버겁게 느껴졌다. 단 하나의 짐 없이 긴 여정을 떠나는 북극제비갈매기, 최소한의 물품만을 지닌 채 느린 호흡으로 인생길을 걷는 여행자들. 그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고, 짓눌린 무게가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비움' 자체는 그리 낯설지 않다. '내려놓음' 내지는 '무소유' 등의 삶의 방식들이 도서나 방송 등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멍 때리기의 기적'이 화제가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실제 삶을 바꿔나가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욜로와 휘게를 외치며 매 순간을 즐기려 하지만 그 외침의 이면에 미래에 대한 걱정과 회의, 부담 등이 각인되어 있는 건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위를 둘러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독한 관성을 곱씹을 수 있게 하고, 또 자유로운 삶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 자체로 이 책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누구나 여행을 한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것은 어찌보면 여행자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내게 '더 나은 길'은 이 책에 실린 자유로운 여행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현실은 조금 다르지만, 긴 호흡으로 여유로이 걸어가다보면 언젠가 그와 유사한 모습을 한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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