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반민주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기업은 노조를 약하게 만들고, 국가가 관리하는 임금 중재 제도를 없애고 싶었다.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농부들은 독일 농업을 집단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는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불만의 뿌리는 같았다. 세계에서 독일의 위치가 1차 세계대전 패배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경제력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군대·농부들은 똑같은 해결책을 들먹였다. 독일의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국제 협력을 좋아하고, 민주주의·노동자·도시를 수호하는)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끝내고, 농부·군인·대기업 경영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 기반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뒤집으려고 했던 집단 중 히틀러 같은 인물이 통치하는,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독재정부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반대 세력과 타협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나치가 불만 세력, 특히 농촌 지역 신교도의 분노를 가장 잘 포섭한다는 걸 증명하면서 정치 방정식이 바뀌었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정도 세력 있는 반민주 연합에 히틀러와 나치가 빠진 적이 없었다.
언론인들은 종종 복잡한 정치 과정을 간단한 공식으로 줄이려고 한다. 그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선거’나 ‘항의 투표 현 정치에 불만을 표하기 위해 비주류 후보에게 던지는 표 ’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왜 무너지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간단한 공식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치 운동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겪은 유럽의 각종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 특히 패전한 나라들(패전한 것처럼 느꼈던 이탈리아에서도)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편 나치가 그 시대에 잘 맞기는 했지만, 1932년까지도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후 히틀러가 그렇게 권력을 차지하리라고 미리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 사람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는 분노와 증오만큼, 계산 착오와 근시안이 많은 역할을 했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였다. 바이마르에서의 민주주의 종말을 이국적인 나치 깃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돌격대원들의 행진과 분리해 바라보자. 갑자기 모든 게 가깝고 친숙해 보인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 정치가들은 대체로 교활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명국가에서는 히틀러에게 투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중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당시 독일인보다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들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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