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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나에게 ‘여행’이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다.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가 이야기했듯이,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한다.
문득 뚜렷한 대상도 이유도 없이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 부푼 기대를 안고 짐을 꾸리는 것. 거대한 어항 같은 도시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는 것. 그렇게 낯선 것에 온몸을 빠뜨려 흠씬 몸을 적시는 것. 이처럼 상상력이 부족해서 더 가난한 시대에 여행은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낭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분명히 어딘가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늘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이토록 매력적이기에 누군가에게는 결핍의 문제를 넘어 피의 문제가 되고 결국 그를 평생 낭만적인 방랑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여행의 ‘끌림’을 이야기한 이병률 시인처럼.
이병률 시인은 카메라 한 대와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배낭처럼 걸치고 50여 개 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그 여정의 흔적들과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해 한 권의 여행 산문집 『끌림』으로 펴냈다.
여행과 관련된 예순일곱 편의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구성된 이 산문집은 여행과 문학, 그리고 기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권의 로망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서 가장 큰 열정을 바친 일의 추억과 의미를 고유한 언어와 생생한 이미지로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목차도 페이지도 없다는 점이다. 정해진 순서가 없기에 아무 곳이나 펼쳐 보면 그곳이 시작이 될 수 있고, 끝이 될 수도 있고, 잠깐 멈추었다 가는 쉼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마음에 들어오는 글과 사진을 발견하면 그 ‘끌림’에 마음껏 빠져들면 그만이다. 마치 우리의 여행길이 그러하고 여행에 대한 기억이 그러하듯이.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무엇이 이병률 시인으로 하여금 그 낯선 곳들에 흠뻑 빠져 길 위의 유랑자처럼 떠돌아다니게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여행은 결국 ‘사람’이 아닐까 싶다.
손님들에게 마음에 드는 비누 향을 고르게 함으로써 기억에 남는 하루를 선사했던 멕시코 이발사 곤잘레스. 기약 없는 약속을 굳게 믿고 줄곧 자신을 기다리던 순수한 캄보디아 젊은이 ‘던’. 엄마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 부단히 노력해 고급 식당 요리사가 된 페르난도. 베니스 숙소에서 머물다 떠날 때면 다음 사람을 위하여 자그마한 선물을 남겼던 따뜻한 투숙객들…….
이병률 시인은 언제나 여정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과 각양각색의 삶의 풍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국적, 나이, 신분과 상관없이 인연을 맺었다.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다쳐도 또다시 사람을 믿고 사람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 그 누구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굳건히 믿는 사람. 정이 든 인연들과 헤어질 때의 쓸쓸함마저도 사랑하는 사람. 걷고 사람을 만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결국 그가 걸어 들어간 곳은 사람의 풍경 안이며, 그를 끌어당기는 것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와 함께 여행을 하며 그 여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우리가 왜 그토록 여행을 열망하는지, 지금까지 뭉뚱그려진 감정으로만 느꼈던 이유들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도 위를 서성이게 하는 힘. 또다시 떠나기 위해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끊을 수 없는 운명. 이런 게 바로 여행의 ‘끌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