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ㅣ 인간 3부작 1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평점 :
‘인간은 세계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권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 완전성,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는 실현된다는 희망내지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책속에서 알게 된 이 말이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든든함으로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교수로, 한국칸트학회 회장인 저자의 칸트 3대 비판서 주제별 특강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다소 딱딱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특히 강의마다 끝 부분에 질문과 답으로 되어있어 현장감이 더해져 집중할 수 있었다.
‘칸트’하면 떠오르는 것은 근대철학의 중심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무 부러울 것이 없던 그 때. 나름대로 자아실현이나 삶의 본질 등에 대해 사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치기어린 결심으로 철학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철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저 책을 읽었다는 것이 전부였을 뿐, 아니, 오히려 그들은 왜 굳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에 대해 끝도 없이 풀어헤치고 파고 들어가고, 다시 또 엮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 것이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그 때, 그들의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로부터 시작된 것들이 개념으로, 정의로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칸트의 철학은 두 번 정도는 읽었는데 도통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역시 읽었다는 것만으로만 여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칸트라는 이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한 번쯤은 그저 읽는 것에서 벗어나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특강은 저자를 통한 이야기와 설명이 곁들여져 보다 만족감을 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묵직한 어감만큼 이번에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알려주는 대로 방향을 잡아가보기로 한다.
최초의 프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소박한 수공업자인 아버지와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의 아홉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자연을 잡하고 신의 섭리를 알게 해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은 인격형성에 많은 여향을 주었다.
6세부터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중, 고등학교 때는 라틴어에 심취했고 대학에서는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생계를 위한 가정교사 활동을 했고 31세에 시간강사로 46세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형이상학과 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칸트가 살았던 저택을 마주하니 마음이 반짝인다. 40세가 넘어서야 고정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단호하고 고지식한 성격 탓도 있었으리라. 오로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해놓고, 그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은 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칸트의 철학은 신적인 것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이성주의적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찾을 수 있다.
1강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하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순수이성 비판’에서 찾는 내용이다. 순수이성비판은 가장 낯익은 말로 칸트는 인간 마음능력을 감성, 이성, 지성으로 쪼개어 봄으로써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일 먼저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것은 학문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학문이란 먼저 많이 배우고 그것이 쌓이면 스스로 물어 분별하는 것으로 그게 바로 비판으로 철학함을 배우는 것이지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얼굴이 홧홧해진다.
이 강의를 들으며 잘게 분리되어가는 근본적인 것들을 보며 막연하게만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수이성은 오로지 자격으로 존재하는 자를 뜻하며 인간의 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순수이성 비판은 순수이성의 자기 한계규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적 논리학을 다루고 있다. 공간, 시간은 존재의 관문이자 지평으로 공간과 시간상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 있는 현상, 인간의식 방식에 달려있는 관념, 특히 인간의식에 선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4종 12개의 순수 지성개념들은 무질서하게 떠돌던 것들을 제자리로 찾아가는 확실함을 갖게 했다. 지금까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써왔던 말들의 기본개념을 한 번도 깊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사고의 형식을 범주고, 범주에서 사고 작용이 통각으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은 마침표를 찍는 느낌이었다. 칸트의 통각은 자기의식이라는 것도.......
그러고 보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인간으로서 나는 공간, 시간상에서 직관한 것만을 의식할 수 있는 것으로 앎의 대상은 자연세계뿐인 것이다.
2강에서는 도덕학 부분으로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실천 이성비판‘에서 찾고 있다. 이 질문에는 선을 행해야 한다는 답이 주어진 만큼 문제의 본질은 ’선이란 무엇인가?‘이다. 선에 대한 질문은 누구나 해보는 것으로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한 만큼 더욱 집중하게 된다.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 하므로 도덕 문제의 중심에는 자유개념이 들어간다. 당위는 이념 또는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상세계의 명제이고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이에 대한 학문이 ‘윤리형 이상학’이며 설천이성 비판을 통해 성취된다.
칸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곧 선의지이며 그 바탕에는 인격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는 것이고 행위의 선악은 이미 동기에서 드러난다는. 결국 법치 주의자이자 의무자이며 동기주의자이다.
이런 칸트의 윤리이론이 인연과 정으로 맺어진, 보은의 윤리가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적응도지 않는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우리 민족이 정이 많다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정을 중시하다보니 얽히고 설켜 좋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작 나 자신부터 그런 보은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이제는 한 번은 더 생각해보는 습관을 질러야겠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바로 자유에 대한 내용이었다. 보통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한다’는 말을 칸트의 논리로 보면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인간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자유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문장의 앞, 뒤가 바뀌었을 뿐인데 칸트의 논리에 힘이 실리는 것은 선의지가 의무라는 생각 때문이다. 거기에 질의 응답에서 칸트의 ‘최고선’개념 등장에 대한 이야기는 행복과 최고의 선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 3장은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또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질문을 ‘판단력 비판’에서 답을 찾고 있다.
먼저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합목적성으로 칸트는 판단력의 ‘자기자율’이라 한다. 그리고 다시 감정에 의해서 판정하는 능력인 ‘미감적 판단력’과 자연의 실제적 합목적성을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판정하는 능력 ‘목적론적 판단력’으로 나눈다. 미감적 판단력은 합목적성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미적 감정, 쾌감으로 사람마다 다른 감관적 감정과 자유로운 상상력과 지성이 합쳐져 나오는 특별한 쾌감이 있는데 칸트는 자유미를 미적 쾌감에서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미적 판단의 한 요인이고 감성의 한 능력인 상상력은 감각기관과 함께 감성기관이다. 다시 또 분류해보면 오감은 외감, 반성하는 능력은 내감으로 상상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상상력과 지성이 합일하는데서 미적 판단. 미적 쾌감이 생긴다고 하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는 순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게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생각으로.
최고의 선은 자연의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이는 상태로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처럼 지상이 천국이 될 수 있기를, 덕행에 알맞은 행복이 함께 하는 세상이 바로 칸트가 생각하는 합목적인 세계이다. 이런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덕행을 행해야 한다.
그러고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 칸트의 철학적인 답은 인간은 세계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권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 완정성,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는 실현된다는 희망내지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슴 저 밑으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되찾은 것 같은 설렘으로. 물론 굳이 이렇게 철학적 사고와는 무관한 삶도 불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철학적 사고가 더해짐으로써 삶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생각이다. 인간으로서 본연의 자세를 짚어보고,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은 안으로 단단하고, 차곡차곡 쌓아감으로써 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물론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을 위해 해야 할 부분도 채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하다보면 당장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참 진리를 밝히는 것으로 인류의 복지와 존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율적 인간의 위상을 논리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로 자존심을 갖게 되고, 자긍심을 갖게 되는 일은 인류복지를 위해 중요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칸트의 철학은 인간 의식의 자발성, 자율, 자기자율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자유임을 해명함으로써 자유의 철학, 자율의 철학이다. 가늠하기조차 힘든 때의 칸트 철학이 지금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존재자의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만큼 자신감과 자긍심으로 삶을 살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세 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어본다. 그럼으로써 내 삶의 깊이가 더 깊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