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저승에 가면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어야. 그 나무에는 이 세상 사람들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 이름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는 구나. 사람이 죽어 다시 이 세상으로 오는 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 그 때 저승사자가 나무로 데려가 태어나고 싶은 이름표를 고르라고 한단다. 그러면 너는 워떻게 허겄냐? 당연히 살아 있을 때 부러웠던 사람의 이름표를 고르겄지? 그런디 그 이름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걸어왔던 길도 마땅치가 않은 거여. 다른 이름표를 봐도 마찬가지이고. 그려서 결국 자기 이름표를 떼어 이 세상으로 나온다는 구나. 그러니께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지나고 나면 좋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여.”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대로 아버지는 다시 당신이 걸어왔던 길을 택하셨을까?

‘아버지’ 단란한 가족사진의 그림을 보는 순간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이 책은 일본뿐만 아니라 만화계에서 널리 알져진 작가가 고향에 대한 마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담은 것으로 자칫 무심하게 되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돗토리로 향하는 요이치.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자신만의 생각으로 아버지를 외면한 채 살아왔다. 그저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 단란했던 때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그러다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주변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번 모습을, 삶을 마주하게 된다.

이발사로 평생을 살았던 요이치의 아버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성실함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원칙을 지켜나갔고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변함없었고 아내와 자식들은 꿋꿋이 버티어내는 힘이 되어주었다.

전후 최대로 일컬어지는 돗토리 대화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아버지는 그나마 가지고 나온 단 하나의 이발용 의자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처가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자 그 빚을 갚기 위해 단 하루를 편히 쉬지 못한 채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요이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이발소에서 묵묵히 일만하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즐거움은 일을 마치고 마시는 반주뿐이었다는 것도. 그래서 요이치의 곁에는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들이를 갈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요이치 아버지의 묵묵함이 안타까워진다. 그 모습에 내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내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믿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가족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요이치의 아버지는 나의,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요이치의 엄마 키요코는 이발소는 물론 출장이발까지 다니며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외로움을 누나 하루코의 담임선생님인 마츠모토 선생님으로부터 달래게 된다. 요이치가 키우던 개 치루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앓고 있자 가정방문을 왔던 선생님이 수의사한테 데려 가는 것을 계기로 가까워지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마츠모토 선생님과 함께 요이치와 하루코를 두고 떠난다. 그 때 요이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혼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아픔을 갖게 하는 것은 부부보다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동딸로 곱게 자란 키요코가 아이들을 두고 이혼을 선택한 것은 남편과 살아온 환경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크다는 생각이다. 가족을 우선으로 헌신을 희생하는 남편의 삶은 여유를 갖고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바라는 자신의 삶과는 너무 달랐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요오치와 하루코는 너무 어렸고 가슴 깊은 곳에 않는 상처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깊은 아픔으로 절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 키요코와 이혼을 한 후에 아이들을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한 오타츠루코와 재혼을 함으로써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 후로 요이치는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고향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달리면 개운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육상부에 들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는 외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에서 나아가 사진부에서 활동했으며 도쿄대학에 진학함으로써 그렇게 바라던 아버지의 곁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요이치는 아버지를 찾지 않은 채 도시 생활에 만족했다. 누나 하루코가 결혼 할 때. 스물여덟으로 로코와 결혼할 때도 결혼식을 올린 후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대신할 만큼,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를 찾지 않았으니.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요이치 아버지를 마주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아들이 키웠던 개 로코를 돌보고,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헛헛함을.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아버지의 참모습을 깨닫게 된 요이치의 눈물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을 것이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다정한 웃음을, 아버지와 가족의 따스함으로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도.......

따뜻한 봄 햇살의 온기가 한가득 머문 마루, 그곳에서 놀고 있는 어린 요이치. 돌아보면 아버지가 있고, 요이치가 고향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처럼 나에게도 떠오르는 잔상이 있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이 지내던 그 때 아버지는 작은 구둣방을 하고 계셨다. 가죽을 자르고, 고무풀로 붙이고, 망치질을 하고.......나는 그런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자투리 가죽으로 소꿉장난을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가끔씩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사탕을 사먹기도 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난쟁이와 구둣방 할아버지’라는 동화가 생각났고 언젠가는 아버지 구둣방에도 난쟁이 요정들이 찾아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내 발에 새 구두를 신겨 주셨는데 한 번은 치수를 잘못 재어서 다 완성한 구두를 신어보니 너무 작아 신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구두를 만들만큼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새 검정 구두를 툇마루에 모셔 놓고 신고 있던 구두를 한 해 더 신어야 했다. 구두 앞부리가 헤져서 다 벗겨지고 작아서 발이 옴추려 들 때까지. 그래도 툇마루에 반짝이는 새 구두를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새 구두가 아까워 버리지 못했고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한평생 구두 만드는 일밖에 모르시던 아버지는 가끔씩 저녁나절이면 내 손을 잡고 가게 가까운 공원에 가시곤 했었다. 구두가 망가진다고 놀 때는 벗어 놓고 놀고 있으면 아버지는 구두 속에 나뭇잎을 가득 담아 놓거나 때로는 자갈을 가득 담아 놓으셨고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했었다. 그리고 구둣방으로 돌아올 때면 더 놀고 싶어 하는 나를 달래주느라 업어 주셨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나를 따라오는 구름을 세곤 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물려 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지만 성실해서 늘 변함이 없고, 거짓말 할 줄 모르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어 내고.......자식의 나이를 지나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자리에 서고 보니 이제야 고단했을 아버지의 삶을 다독이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삶이 훌륭했다는 것도.

아버지는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구두를 만드셨지만 난쟁이 요정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 흔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하신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 아버지는 힘들고 어려웠던 모습보다는 내 구두 속에 사랑을 가득 담아주셨던 따뜻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난쟁이 요정은 힘들고 어려웠던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던 바로 아버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끝이 싸아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어 불러본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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