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분 씨네 채소 가게 - 채소 장수 일과 사람 13
정지혜 지음 / 사계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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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분씨네 채소가게’라는 제목과 함께 책의 겉표지에 그려져 있는 동이 엄마의 모습은 나에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되찾게 해주었다. 양 손에 채소를 들고 손님을 부르는 동이 엄마의 모습은 바로 내 엄마의 모습이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통은 어렸을 때 나의 놀이터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 책은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일과 사람에 대한 내용을 엮은 것 중 하나로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동이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시장에서 채소를 사는 단순한 과정보다는 채소를 파는 상인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채소가게 주인이 되는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발머리 귀여운 동이이다. 동이 아빠, 엄마는 햇빛시장에서 ‘순분씨네 채소가게’를 하는 채소장수이다. 가게 이름인 순분씨는 동이 할머니 이름으로 삼십년 동안 채소를 팔았고 지금은 낮에 잠깐씩만 나오고 대부분 일은 아빠, 엄마가 하고 있다.

동이 아빠, 엄마는 날마다 새벽이면 농수산 도매시장에 가서 밤사이 곳곳에서 온 채소들을 사와 장사를 한다. 동이가 할머니와 함께 햇빛 시장에 가면 아빠, 엄마는 도매시장에서 사온 채소를 가게에 내리고 정리를 하면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채소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나면 엄마는 돈주머니를 허리에, 비닐봉지는 옆구리에 차고, 아빠는 앞치마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일을 시작한다. 저울, 칼 등을 비롯한 장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는 것은 물론 채소를 내놓기 전에 보기 좋게 잘 다듬어 놓고 고추나 버섯은 작은 봉지에 담아 놓고, 얼갈이나 상추는 신문지를 덮고 물을 조금 뿌려두어 싱싱함을 유지하게 한다. 도 아빠는 단골 식당에 주문 받은 채소를 배달하기 위해 차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나는 동이 아빠, 엄마의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남들이 곤히 자는 새벽에 도매시장을 찾는 것은 싱싱하고 좋은 채소를 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0년 동안 채소장사를 해온, 입에 들어갈 거니까 깨끗하고 좋은 걸로 팔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신조는 든든함을 더해주었다. 그 뿐인가? 장사를 하기 위해 채소를 다듬고, 작은 양으로 나누어 담아 놓고, 적당한 가격을 정하는 과정은 채소를 파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동이 엄마는 채소 파는 일은 물론 손님들이 채소 고르는 법이나 요리법을 물으면 척척박사처럼 일려준다. 특히 봄이면 갓 나온 나물을, 여름이면 열매채소를, 가을에는 무, 배추를, 겨울에는 말린 채소를. 이렇게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많고 값이 싸기 때문에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도. 채소 가게를 하는 동이네 식구는 보통 때는 팔기에 좀 못났거나 자잘한 채소를 먹고 좋은 채소는 손님이 오셨거나 할머니 생신날에만 먹는다.

 

나는 어린 동이가 채소만, 그저 좋지 않은 채소로 만든 반찬에 입을 삐죽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바로 어렸을 때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 때 아버지는 시장 입구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고 계셨고 엄마는 구둣방 앞에 좌판을 깔아놓고 철에 따라 과일이며 옥수수, 군밤 같은 것을 파셨다. 엄마도 매일 새벽이면 경동시장에 갓 물건을 떼어오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고 그 물건들을 손질해서 보기 좋게 놓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도 엄마를 도와 사과를 반짝반짝 닦기도 했고 옥수수를 봉지에 담기도 했고, 복숭아를 바구니에 담기도 했었다. 그러면 엄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쥐어주곤 했었는데 동이네처럼 좋은 것 보다는 흠이 있거나 실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던 것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동이에게 짜장면 소스를 주고 간 신흥반점 아저씨처럼 우리 구둣방에도 봉지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은 생선이 들어있기도 하고, 때로는 양과자가 가득 담겨 있기도 하고, 한 번쯤은 고기가 담겨 있기도 했었다. 모두 시장에서 장사는 분들이 자신이 파는 것들을 가져다 준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아버지는 손님들 중 구두를 맞춰 신고 버리고 간 구드를 깨끗이 손을 봐서 시장사람들에게 주기도 하고 간단한 수선은 그냥 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상이군인으로 좌판을 끌고 시장을 돌아다니던 김씨 아저씨이다. 그 분은 전쟁 중에 두 다리를 잃어 무릎 밑에 두꺼운 헝겊을 대고 다니셨는데 아버지가 조각난 가죽을 연결해서 튼튼한 보호대를 만들어 주가 김씨 아저씨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손톱 깎기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렇게 시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정을 주는 따뜻한 곳었다. 물건을 사고팔며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고, 덤을 주기도 하고, 값을 깎아주기도 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 사이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하는 이웃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시장은 우리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햇빛 시장 상인회에서는 노래자랑을 열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주변에 큰 마트들이 들어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지자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하게 된 것이다. 며칠 동안 기다려왔던 노래자랑이 시장광장에서 열리자 동이는 노래를 부르고 할머니는 춤을 추었다. 동이는 상품으로 자전거를 타기 위해 3등을 목표로 삼았지만 인기상으로 시장 상품권을 받았다. 저녁시간이 되자 시장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동이 엄마는 목청껏 손님을 불러 모아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다.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먼저 온 순서대로, 원하는 만큼, 그리고 덤으로 주는 것도 잊지 않고.

그렇게 한바탕 북적거리던 시장이 조용해지고, 문 닫을 기산이 되면 그제야 상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하고, 서로 바꾸거나 나누는 장을 본다. 날이 어두워지고 시장이 조용해지면 동이네 채소가게도 뒷마무리를 하고 문을 닫는다.

 

나는 동이가 아빠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마도 동이는 자기를 따라오는 별을 세다가 잠이 들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정겨움을 모르는 채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이 안타까워졌다. 장을 보는 곳은 으레 대형마트나 슈퍼에서 보는 것으로 여길 만큼 우리 주변에서 시장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처음에는 동네 상권을 걱정한다며 반갑지 않은 눈길을 보내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당연한 것처럼 장바구니를 들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이 또한 편리한 생활에 금방 젖어드는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형마트의 일회용 접시에 담겨 말없이 진열되어 있는 물건보다는 상인의 손으로 직접 담아주는 물건에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물건을 사고팔며 나누는 이야기로 정을 나누고, 한웅큼씩 집어주는 덤으로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다음에 다시 또 찾게 되고.......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 손을 잡고 시장을 가야겠다. 그곳에서 장을 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상인들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삶의 모습을 실감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동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단발머리 깡충이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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