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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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무덤덤한 손길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미미한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라는 특이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람, 낱말카드, 활자 같은 내가 일상에서 아무 의미 없이 행하던 것들이 색다른 느낌으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애란 작가님의 세심하고 부드러운 필체는 나를 어르고 다독여 그동안 굳어있던 내 온몸 구석구석의 세포들을 깨워 꿈툴거리게 해주었다. 두근.......

이 이야기는 엄마 뱃속의 아이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산 깊고 물 맑은 농촌마을, 육남매 중 여섯째로 입이 걸어 ‘시발공주’로 불리던 엄마, 최미라, 그녀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완고한 외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자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날 밤, 심부름으로 전해야 할 돈을 들고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대수를 만나게 되었다. 태권도를 잘 해 체육고등학교에 다니던 대수는 대회에서 부정 판정한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고 선배들로부터 집단구타에 정학까지 받아 앞일에 대한 고민으로 숲속 개울물에서 마음을 달래다가 뜻하지 않게 미라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착하고 착하기만 한 대수, 그가 바로 아기의 아버지이다. 두 남녀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으로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어쩌다 아빠, 엄마가 되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버린 대수와 미라를 보며 안타까워졌다. 한창 꿈을 꾸고,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아무 거리낌 없을 나이에, 막막한 현실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나름대로의 막막했던 청춘을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무라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되어버린 그들이 겪어야 할 현실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서 미라의 뱃속에 두근거림으로 존재를 표현하게 된 아기가 바로 아름이다. 엄마의 임신사실로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된 수, 두 사람은 이듬해 봄 살림을 차렸고, 아름이도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덟 나이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께서 유명케이커 스포츠 전문점을 차려 주었지만 곧 문을 닫았다. 그 후고 아름이가 4살 때 병 때문에 큰 병원을 찾아 부천으로 이사 온 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열일곱 살, 아름이는 열일곱 살이지만 조루증을 앓고 있어 여든의 외모를 갖고 있다. 외모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부분도 함께 늙었고 급격한 노화현상으로 각종 합병증까지 앓고 있다. 주로 집에서만 생활하는 아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자신이 낸 숙제를 매일 하고, 부모님께서 귀찮아할 정도로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가 문득 부모님을 위한 선물로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생일선물로 받은 노트북으로 자신만의 글을 쓰게 되었다. 혈압약, 진통제, 관절약, 위장약을 비롯한 약을 의존해 하루를 살아내고, 툭하면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까닭에 아름이네 집은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아름이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는 최선을 다했고, 그런 부부를 바라보는 아름이는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워 나갔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던 아름이는 자칫하면 실명할 수도 있다는 황반변성 질병이 더해져 입원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병원비를 마련할 여력이 없어 결국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했다. 그 와중에 어마가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 밤새도록 운동장을 뛴 탓에 아름이가 희귀병에 걸린지도 모른 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작성해온 원고를 버리고 만다.

나는 아름이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열일곱의 나이에 여든의 외모라니, 130cm 키에 눈썹도 없고, 게다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단 하루도 편하게 지낼 수 없다니. 아름이를 뒷바라지 해온 부부가 지내온 날들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것도 아름이 자신이 겪어 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먹먹해진다. 자식의 나이를 지나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나서야 부모님의 고단했던 삶을 다독일 수 있는 것처럼 아이를 낳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다시 살고 싶기 때문이라는 아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아름이는 부모님을 통해 자신의 젊은 모습을 찾고 부모는 아름이를 통해 미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래도 변치 않은 것은 부모는 젊어도 부모의 얼굴을, 자식은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모와 자식은 키우고, 자라며 서로에게 자신을 녹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근두근.......

아름이네 가족은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방송이 나간 후로 많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이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름이는 프로그램의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글들 중에 자신을 달래주는 글을 보내준 이서하라는 아이와 글을 주고받게 된다.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그 아이도 자기와 같은 나이에 병을 앓고 있다는 것, 여자아이라는 사실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서른이 넘은 아저씨가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아름이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부모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은 아버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동생과 손을 통해 미리 인사를 하며.......

갑자기 코끝이 싸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열일곱 해를 살고 간 아름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재미있는 자식이 되고 싶어 하던 모습이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아름이와 유일하게 비밀을 나누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게 한, 가을과 겨울만 알던 아름이에게 진짜 여름이었던 서하, 그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짧지만 아름이에게는 진짜 무성한 초록빛 여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자식을 보낸 부모의 넋 나간 모습을 보니 눈물이 흐른다. 특히 아름이가 희귀병에 걸린 것이 자기 탓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던 아름이 엄마는 가슴속에 묻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지.......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고, 남겨진 흔적을 매만지며 달래보다가 정작 이름을 부르면 아무 대답이 없다는 것, 그것 때문에 마음은 다시 지옥이 되고 만다. 그런 날이 무수히 반복되고 나서야 가슴에 묻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아름이가 넘겨준 낱말카드를 이어 보기로 했다. 햇살, 투명한 가을 햇살 한 줌, 그 사이로 스쳐 날아오는 바람, 선선한 바람 한 줄기, 그 뒤로 제 풀에 스려져 버리는 낙엽, 바삭바삭한 낙엽....... 그동안 무심했던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람이 분다. 한 줄기 바람이 내 가슴에 내려 앉아 심장을 두드린다. 가슴이 뛴다. 그 뜀으로 내 삶이 조금씩 소리를 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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