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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어머니 이야기’ 이 책은 만화가로, 사십대의 딸인 저자가 팔십 대 어머니의 삶을 담고 있다. 모두 4권으로 된 두툼한 분량만큼 그 내용이 자세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벗어나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등이 함께 실려 있어 많은 것을 얻게 해주고 있다. 특히 식해, 떡 등 우리가 잘 모르는 이북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는 물론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어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은, 맛있는 즐거움도 전해준다,
다른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의 , 엄마의 삶이라는 사실은 가슴에 와 닿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무심했던 내 엄마의 삶을 다독여주는 것은 물론 지금 엄마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도 갖게 해준다.
솔직히 말하면 만화는 어렸을 때 순전히 재미삼아 봤던 게 전부로 그 후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이 이야기는 만화가 주는 정겨움에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특별한 선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머니, 이복동녀(놋새)는 함경북도 북청군 신북청군 보천리 미사촌에서 어머니 이초샘, 아버지 이근호 부부의 1남 6녀 중 6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홀시아버지와 시누이 둘과 함께 살며 부지런히 일했고 까다로운 홀시아버지의 시집살이도 감내하는 착한 며느리로, 강한 어머니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제법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단호한 성격의 아버지는 일본군으로부터 산을 지키기 위해 5년 넘는 재판을 했고 끝내 이겼지만 오히려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팔게 되고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자 다시 사들이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토지에 대한 든든함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4대독자 외아들, 찬세(억석) 오빠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감,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남아선호 사상의 뿌리 깊음을 실감하게 된다.
책 속에서 색다른 재미를 갖게 해주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음식이었다. 창란젓, 명란젓, 아가미젓을 기본으로 명태와 차조밥과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섞어 만든 명태식해. 우거지 무채, 두부, 쇠고기 등을 속으로 만드는 명태순대는 준비과정부터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어 차근차근 따라 해봐야겠다는 치기어린 결심을 갖게 한다. 황해도가 고향인 올케언니 덕분에 가끔 맛보게 되는 가자미식해의 독특한 맛을 무척 좋아하다보니 명태식해도 맛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손님을 대접할 때면 으레 직접 쌀을 빻아 떡을 만들고, 찹쌀로 밥을 지어 올리기도 하고 소고기를 듬뿍 넣고 끓이는 국 등으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리고, 손님들이 돌아갈 때면 양손 가득 음식을 들려 보내는, 내가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익히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뿐인가? 재봉틀로 식구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모습도 내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그 재봉틀이 남편의 노름하느라 툭하면 전당포에 잡히기도 하고 도둑을 맞기도 했지만 늘 곁에 두고 함께 하는 모습도.
집안이 외아들에게 거는 기대만큼 억석 오빠는 일본인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성진, 배무선 등지에서 공사를 하며 큰 돈을 벌어 잃어버린 산을 되찾고 새집을 짓게 되었다. 그 즈음 이복동녀씨는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김시득을 만나 결혼을 했고 5남 2녀를 낳아 키웠는데 그 중 막내가 바로 저자인 은성이다. 모든 게 낯선 시댁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억척스럽게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밀고 밀리는 과정에 부모님을 두고 남한으로 피난을 오고, 수용소에서, 어린동주와 함께 배급으로 허기를 달래고 쪽잠을 자고, 군인으로 나간 남편을 따라다니며 주먹밥을 먹이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는 모두 힘들고 어려웠다는, 막연함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내 엄마의 삶이 그저 힘들고 어려웠다는 막연함으로 대신한 것처럼, 어쩌면 지금 내 아이들도 내 삶들 그렇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삶을 이렇게 오롯이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물론 이복동녀씨 자신에게도 또 다른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부모님의 삶을 막연하게 여기는 것에서 확실하게, 민낯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으로,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이복동녀씨에게 있어 큰아들 동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력한 남편 대신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온갖 일을 하면서도 버티어낼 수 있었던 것은 늘 밝게 웃으며 씩씩하게 생활하는 동주의 힘이 컸으리라. 동주가 사우디로 돈을 벌러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수유리에 정착하며 형편이 나아지지 시작했고 단칸방에서 넓은 집으로, 급기야 집도 살 수 있었다. 반면 그 때부터 이복동녀씨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했고 병원에서 약을 지어먹기도 하고,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당시 저자인 은성이는 재수를 겪고 대학생이 된 후, 보통의 대학생처럼 잠깐 동안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고, 5박 6일 심리치료 체험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전환점을 찾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오빠들도 결혼해서 각기 삶을 살고 있어 정작 엄마가 심하게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도 그 누구도 관심 갖지 못했다. 당신 스스로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참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이해하는 게 더 쉬웠으니,
그런 엄마를 보듬어 준 이가 바로 저자 은성이다. 삶에 부정적인 시선이 걷히면서 엄마를, 자신과 같은 여성의 삶이 눈에 들어옴으로써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하며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엄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모르고 있던 부분을 알아가는, 그럼으로써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커졌을 것이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모녀가 이불을 꿰매며 이불 위에 누워 있을 때 엄마가 훌쩍 날아올라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는 코끝이 싸아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급기야 그동안 묻어두었던 울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내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 때, 아버지는 시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고 계셨다. 구두를 만드느라 거칠어진 손만큼이나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정말이지 구두 만드는 일밖에 모르셨다. 덕분에 엄마는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물론 집안의 대소사까지 도맡아 하셔야 했다. 그 뿐인가? 넉넉지 않은 형편에 자식 넷을 키우려다보니 구둣방에 점원을 두는 대신 아버지 곁에서 소소한 일들을 거드셨다. 그래서 간단한 구두 수선은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와 함께 구두 만드는 일도 하셨다. 아버지께서 만드는 구두는 남자 구두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나만을 위한 구두를 만들어 주셨다.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라 다른 누구에게 팔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구두를 만든다는 흐뭇함으로 하셨을 것이다. 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구둣방 앞에 좌판을 깔고 계절에 맞춰 과일이나 옥수수, 군밤, 군고구마 같은 것을 파셨다. 새벽에 아버지와 함께 구둣방에 가시면 밤늦게야 집에 오는 힘든 생활을 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셨다.
엄마는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버지 구둣방에서 일을 하셨고 급기야 자궁암 수술을 받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다.
"그만 울거라. 아기들 놀란다. 나는 괜찮여. 그나저나 나야 이제 다 산 세상이지만 니가 걱정이여. 험난한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어서 죽고 싶다 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야. 그럴 때면 눈 질끈 감고 죽을만큼 힘을 내서 버티어야 헌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살 방도가 생기는 거여. 미안하구나, 엄마라는 사람이 힘들 때 도와주지도 못해서......."
병실에 누워계신 엄마가 내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제야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신 엄마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때는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빚만 잔뜩 지고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몰랐었다. 그래도 엄마 말씀을 기억하며 버티어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물려 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지만 성실해서 늘 변함이 없고, 거짓말 할 줄 모르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어 내고.......
한평생 구둣방에서 일하시며 자식 넷을 키우신 엄마는 결국 그 흔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하신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 엄마는 힘들고 어려웠던 모습보다는 내 구두 속에 사랑을 가득 담아주셨던 따뜻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딸로서 엄마와 오래 살고 싶었다는 바람, 가장 슬펐을 때는 동주가 병이 들었을 때고, 가장 기뻤을 때는 동주의 병이 나았을 때라는 것처럼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삶 중심에는 자신보다 자식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이제 이복동녀씨는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로 퇴행성관절염으로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기억도 조금씩 희미해져간다고 한다. 가끔씩 고향하늘 어귀를 서성이는 꿈을 꾸거가 남편이 쫓아오는 꿈을 꾸면 놀라서 깨어나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엄마를 위해 엄마의 삶을 만화로 담아낸 딸, 모녀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복동녀씨가 오랫동안 은수씨 곁에 머물러 주시기를.
이제야 깨닫게 된다. 내가 대신 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슬픔이, 기쁨이, 즐거움이, 힘겨움이 다른 누가 아닌 나의 몫이라는 것, 그래서 엄마의 삶이 바로 내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은 다른 누구의 삶보다 훌륭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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