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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평점 :
끝이 노랗게 마른 대문 밖의 조릿대로 보면서 춥고 가물었던 이번 겨울이 그들에게 견디기 힘들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다행히 지난 한 주일 동안 제법 많은 양의 비가 연달아 내려서 곳곳에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며 봄맞이 차비를 마쳤다.
겨울이라기엔 이미 어색하고 봄이라기엔 아직 방심할 수 없는 삼월 첫째 주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신경과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신간 『 의식의 강 』이 도착했다. 올리버 색스를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참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에 관심 있던 몇 년 전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그의 책을 읽고는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상쾌한 박하사탕을 맛본 듯했다. 자칫 암울할 수 있는 정신질환자의 현실을 소개하고 있건만 그가 만나고 그가 설명하면 그것은 어느새 두렵지 않고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가 돼있는 마술을 경험했다. 아마도 쉽고 편안하게 풀어쓰는 과학 지식 위에 얹힌 그의 따뜻한 인간미가 나의 마음까지 감싸 안아줬던 모양이다.
암이 발견되고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세상과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었으며 자신이 없는 시간에도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들을 위해 그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쓴 유작 에세이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자신에게 영웅으로 취급되었던 다윈, 프로이트, 윌리엄 제임스의 학문적 성과를 재조명하면서 평생에 걸쳐 지속된 생물학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과 탐구심을 정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뇌에 직접 전달하거나 기록할 방법은 없으며, 고도의 주관적 방법으로 여과하여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마다 여과 및 재구성 방법이 다르고, 한 사람을 놓고 보더라도 나중에 회상할 때마다 재여과되고 재해석되기 일쑤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서사적 진실밖에 없고, 우리가 타인이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는 지속적으로 재범주화되고 다듬어진다. 기억의 본질 속에는 이러한 주관성이 내장되어 있으며. 주관성이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뇌의 토대와 메커니즘에서 유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착오는 비교적 드물고,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굳건하고 신뢰할 만 하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p.134)
이번 책에도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뇌질환 환자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모르는 그러나 궁금해하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비밀스러운 작업 일지를 엿볼 수 있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음부터 지금의 존재였다고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적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하나의 집단으로 볼 때 짧게는 400만 년 전부터 변화를 거듭해왔고, 하나의 개체로 보더라도 한 개의 수정란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건장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뇌의 작은 부위만 손상되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팔다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이다.
나는 그가 얘기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지금 나의 모습과 오버랩시키며 나의 현실을 이해하고 나의 삶을 바라본다. 그래서 나에게 그런 기회를 풍부하게 만드는 그의 책은 흥미롭고 유익하다.
" 모든 동물들은 나름 다양한 수준의 정신을 발달시키거나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p. 88)
1880년대 말 다윈이 지렁이에게도 일종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에게도 '의식'이라고 불릴만한 정신적 자질이 있음을 중명하는 연구결과들을 발표하고 있다.
나 역시 다윈의 입장을 지지하는 진화론자로서 더 이상 인간만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편협한 자만에 머무르지 않고 깨어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의식이란 늘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기 마련이므로, 나의 선택에 정보를 제공하고 나의 지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모든 감정과 의미는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7번 가가 아니라 '나만의 7번가'이며, 거기에는 나만의 개성과 정체성이 가미되어 있다." (p. 197)
특히 잘못 기억하고 잘 못 듣기 쉬운 인간이라는 개체의 취약성과 유연성을 죽음을 목전에 둔 과학자가 우리에게 지적한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불연속적인 시각 프레임과 스냅숏의 융합을 '움직이며 흐르는 의식'의 전제조건이라고 잠정 결론 내리면서, 지금 자신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수많은 순간들의 경험을 자신의 생生인 것으로 감싸 안았다.
인간다움을 알았던 인간적인 인간 한 분이 또 이 세상을 떠났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초록이 넘실대는 가운데 시선을 끄는 파문이 있는 멋진 표지 그림은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것이 인간의 정신세계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마치 우주공간에서 관찰 가능한 물질이 3%이고 암흑물질이거나 암흑에너지라고 분류되는 미지의 세계가 97%라는 물리학자들의 얘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21세기 과학적 발견들은 점차 불안하고 나약한 인간을 신화나 마법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과 감사함을 갖는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과학도서로 올리버 색스의 저서를 추천하는 바이다.
(오탈자 확인 요망 ㅡ 115페이지 6줄 ; 끔찍하고 엄(청)난 열을 내며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