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 (보급판 문고본)
혜초 지음, 정수일 역주 / 학고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 여행기
몇 권 읽어 본 바는 없지만, 최근에 우즈베키스탄을 40여일에 걸쳐 도보 여행한 김준희의 여행기까지. 가끔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내게는 평생의 꿈인 “여행”이라는 갈증을 잠깐이라도 “해갈”하기 위해서이다. 걸었던, 탔던, 투어든 공정여행이든, 여행기가 주는 기쁨은 참으로 크다. 그런데, 어떤 여행기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뛰어넘는 책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도 이 결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록 검증받아야 할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 블러그라는 매체이긴 하지만, 이 “열하일기”의 천만분의 일만큼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는 여행기를 포스팅 할 수 있다면 최고의 보람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데, 혹시 이 존경심이 혹시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면 변심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서역여행기, 그렇게 후손에게 남긴 최고의 책을 만나게 되면.. 책이 배달되어 오는 동안 내내 그 걱정을 했다. 
 

■ 혜초 “왕오천축국전”
...704년(성덕왕 3년) 신라출생, 719년 당 광주에서 밀교승 금강지 사사, 723년(20세) 인도를 시작으로 727년(24세) 11월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구자에 도착. 733년(30세) 장안 천복사에서 밀교연구 등 명성을 떨치다 780년 4월 15일 (77세)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 책 말미에 소개된 혜초의 년표중 무의로 골라잡은 혜초의 년대기이다.
 

부끄럽게도 이 유명한 책이 한 행이 27에서 30여자로 서술된 227행에 불과한 책인줄을 진즉 알았으면, 아마 한참 전에 읽었을 것이다. 한문이야 당연히 역주를 비교해가며 읽을 터이니, 그런데, 어쩌면 만일, 그냥 본문 주해나 가벼운 역주로만 읽지 않은 것이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부는 늦을수록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은, 2008년에 정수일 선생이 역주로 정리한, 학고재에서 출판된 이 책이 마치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모양새를 띄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 물론 다른 책을 읽지 않았으므로 선학들에 대한 불경이 될 수 있겠으나, 며칠 전 동양사학을 전공한 선배도 같은 입장을 보여 주었음으로..) 가만 보니까, 고전과 역사책은 늦게 공부할수록 유리한 모양이다.
 

중국 광주에서부터 인도를 거쳐 서역을 돌아 다시 중국땅 안서도호부까지 4년에 걸쳐 40여개 나라를 순방한 여행기치고는 참 간략하다. 주로 불교성지를 중심으로 한 인도의 기행, ·····스탄으로 명명되고 있는 서역길의 풍습들, 그리고 안서도호부에서의 마침표를 찍는 순례길은 우리 선조가 당시의 풍속을 견문見聞과 전문傳聞을 통해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3권의 책이 있을것이라는 얘기, 전문이라는 연구 등의 설이 있다지만, 지금으로서야 이 한권에 불과하니, 그 간략함 때문에, 원문만 가지고는,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이 넓은 지역에 대한 여행기로는 매우 부족한 정보일수도 있다. 그것이 전, 후 시대의 다른 견문기나 역사책과 달리, 수행 중에 짤막한 단상을 적어놓은 것으로 이해 하겠지만 말이다. 
 

정수일선생의 역주가 없었더라면, 나 같은 문외한이 이나마 독서의 즐거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비롯해서, 신당서, 위서, 수서, 한서, 등등 혜초 여행기에 앞어거나 뒷선 모든 자료를 섭력하고, 각종 연구서에서 이론異論들까지 함께 정리하여, 혜초의 순례길을 함께 정리해 준 이 역주를 통해, 당시의 풍습과 역사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면서 오류와 오해까지도 함께 잡아 주고 있으니, 읽고 있는 매 순간마다 마치 눈앞에 놓여진 풍경을 담기에 급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이렇게 노고를 들인 책이, 읽어 가면서 바로 까먹어 버리는, 그리고 깊은 이해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단순히 눈으로 일갈하는 이 단순무식한 게으름과 소양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8세기초 삼국통일 후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 부딪치고 있는 현세를 멀리하고 구도를 위해 그 먼길을 떠날 수 있었던 혜초의 정신과, 가끔 여행의 외로움을 표현한 오언시를 통해 역시 한국인의 흥과 멋이 남다르다는 기쁨을 얻었으니 됐고, 여전히 긴가민가한 서역지역에 대한 당시의 풍습을 주마관산격으로나마 한번 읽어 본 보람은 있으니 그거면 됐다 싶기도 하다. (여전히 원문을 가지고 소설의 모티브를 삼은 소설가 김연수의 능력의 못 미친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약이 오르기는 하다) 
 

月夜瞻鄕路 달밝은 밤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緘書忝去便 감히 그 편에 편지 한 장 보내 보지만
風急不聽廻 바람이 거세 화답이 들리지 않네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 타국은 서쪽 끝 땅에 있네
日南無有鴈 일남에는 기러기조차 없으니
誰爲鄕林飛 누가 고향으로 날아가리 
                                              (본문, 여행중 고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오언시 전문)

한시라는 것이 댓구법등을 이용해 서정적인 풍류를 나타내기는 매우 익숙한 양식이긴 해도, 가끔 이렇게 선조들이 남긴 기막힌 시를 읽노라면, 진정한 선조의 멋을 느끼게 된다. 전문적인 연구서이긴 하지만, 본문의 이런 감흥은 이 딱딱한 내용을 매우 재미있고, 부드럽게 읽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이제야 읽음으로서, 한국인 후손으로서의 아주 긴 부담감 하나를 지웠으니, 수양을 쌓는다는 것도, 참으로 긴 여정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이 수양이 감히 혜초의 그리움에 비하겠냐마는.. 
 

君恨西蕃遠 그대는 서역 먼길이 한스럽고,
余嗟東路長 나는 동쪽 긴여정에 탄식하네
                                                                                                         (본문, 오언시 일부)
 

안서도호부에 가까이 와서, 마침 서역으로 떠나는 중국인를 바라보며 던진 혜초의 오언시, 서역으로 떠나는 여정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남은 길을 꼽으며 외로움이 절절하게 나와 있으나, 이 東路長을 단순히 귀로가 아닌, 앞으로 남아있는 삶, 구도 수행의 고단함, 그리고 아마 평생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동쪽끝 땅, 조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확대하면 참으로 기막힌 표현이 아닌가. 이거 참, 천축과 서역에 대한 이 귀중한 자료를 읽고 나서 되새겨보는 것이 혜초의 마음 몇 줄에 불과하니, 정말,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이 길을 따라 한번 직접 걸어봐야 진정한 독후감이 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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