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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를 거닐다
이윤기 외 지음 / 옹기장이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명쾌한 사회과학적 이론에 시나브로 빠져 들었다. 비로소 복잡다단한 세상의 실체가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사회과학적 이론으로 세상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다. 나는 그저 세상을 이론에 끼워 맞추고 있었을 뿐이다. 이론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온전한 몸을 놔두고 이론이라는 엑스선 사진으로 세상이라는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엑스선 사진 덕분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의 골격을 판독할 수 있었지만 골격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살은 사진에 드러나지 않았다. 살이 없는 앙상한 뼈대, 그것이 이론에 경도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앙상한 뼈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살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그 살은 바로 우리네 소박한 삶이며 잔잔한 일상이었다. 거창한 이론으로 파악되지 않는 소박한 삶 속에, 잔잔한 일상 속에 세상의 생명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구체적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나는 추상적 이론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세상은 나에게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다가왔다. 이후로 나는 소박한 삶 속에서, 잔잔한 일상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건져 낼 수 있었다.
이 책은 스물두 명의 저자가 펼쳐내는 스물네 편의 산문집이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 나는 저자들의 화려한 면면에 압도당했지만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부터 나는 저자들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진리를 길어 올린다. 쇠사슬에 묶인 개의 모습을 바라보며 종교의 가르침을 깨닫고, 진흙탕 위에 피어난 연꽃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호도나무 대신 잘못 심은 가래나무를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바람 속에서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형무소의 변소를 깨끗이 닦으면서 부처님의 존재를 가늠하고, 가축의 길들여진 모습을 통해 문명의 그늘을 비판한다.
그렇게 세상의 진리는 거창한 이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소박한 삶 속에도, 잔잔한 일상 속에도 작은 진리들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한 진리들은 소소한 일상조차 애정을 가지고 세심하게 바라보는 자들에게 비로소 열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