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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그늘 ㅣ 당대총서 12
김동춘 지음 / 당대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김동춘'이란 세 글자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강준만 때문이었다. 강준만의 김동춘에 대한 평가가 다른 지식인에 대한 의례적인 평가와는 사뭇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가짜' 또는 언행일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해 왔을 뿐 진짜 진보적 지식인은 존경한다고 누누히 말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누가 진짜 진보적 지식인인가? 나는 김동춘을 첫번째로 꼽는 데에 주저하지 않겠다. (중략) 진짜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우선 그 논문이 한국 상황에 어느 정도 맞는지 비판적으로 해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래서 김동춘이 돋보이는 것이다. (중략) 김동춘은 홀로서기에 성공한 독립적 지식인이다. 그래서 패거리 논리에 따라 봐주는 게 없다. 누구와 대담을 하건 토론을 하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강준만, '진짜 진보적 지식인 김동춘의 지식인 비판' 중에서, 인물과 사상 8)
'남의 이론을 우리 문제에 단순 대입하는 학계의 풍토에 불만을 느끼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과학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고 말하는 김동춘은 가장 한국적인 사회과학자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항상 한국의 역사적 과정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한국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특수를 통해 보편으로 나아가려는 그는 현재의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주류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다.
서구의 미국이나 유럽의 저작들을 보면 항상 이론 속에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들 속에는 우리의 역사가 녹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전통으로부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일종의 식민성이죠. 분단과 식민지 경험이 우리를 정말 근본 없는 자식들로 만들어 버렸다고 봅니다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 : 김동춘 편' 중에서, 현대사상 1997년 겨울호)
이 책에는 한국적 사회과학자 김동춘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에 관해 다각도에서 행한 역사적인 고찰을 다루고 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근대성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한국을 전근대적 사회로 단정하는데 반해 김동춘은 '독특한 한국의 근대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한국적 근대성의 특수성을 탐구한다.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습의 근원을 역사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개의 중요한 코드는 바로 '폭력'과 '돈'이다. 이 두 가지는 곧 근대한국사회를 읽어내는 핵심코드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국가폭력'을 과도하게 용인했으며 이러한 '폭력'의 지배하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가치가 숨쉴 수 있는 빈틈은 거의 없었고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억눌린 욕망을 극단적인 사적이익, 즉 '돈'의 추구를 통해 해소하였다. 따라서 근대한국사회는 '폭력'과 '돈'의 지배하에 놓인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 '박하사탕'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라/사드'라는 연극을 보면 철학자 사드와 혁명가 마라가 가상의 대화를 나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과정 속에서 사드가 개인주의와 보편주의를 대표한다면 마라는 집단주의와 특수주의를 상징한다. 연극을 보면서 논리적으로는 사드를 지지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마라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은 딜레마이다.
김동춘이라는 학자가 한국사회에서 서구 이론의 식민성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딜레마에 있지 않을까? 내 정신 속에 정서적 민족주의와 논리적 근대주의의 딜레마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것이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해소될지 나는 잘 모른다. 여전히 나는 개인보다는 집단과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구시대의 인간이며, 합리성보다는 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토속 한국인이며, 돈보다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비판자이다. 앞으로의 나의 이론적 작업도 이러한 기초 위에서 계속될 것이다. ('연보 : 우리 현실의 저변에 흐르는 역사를 캐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