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놓치기 쉽지만 주목해야하는 몇 권의 책...

네오콘 프로젝트
남궁곤 편집 / 사회평론 / 2005년 3월
- 가끔 기초 학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너나할 것 없이 봇물터지듯 불만들을 토로하곤 한다.
사실 위의 책은 예전에 "북&이슈"란 서평전문지에서 내게 서평 청탁을 해와 어쩔 수 없이 읽었던 책이다. 어째서 나에게 저 책의 청탁이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저는 국제정치학 전공자도 아니고, 솔직히 저 책을 읽고 소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며 정중히 거절하려 했는데, 하도 다급하게 부탁을 하기에 게다가 이미 그 전에 나의 전공과 상관없이 얼토당토않게 촘스키와 김동춘 선생의 책 서평을 "녹색평론"에 실은 적이 있는데 편집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되면 도망가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읽었던 책이다. 국내의 국제정치학 관련 학자들이 미국의 신보수주의 역사와 현재, 정세, 그리고 그들이 정신적 대부로 모시고 있는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파헤치고 있었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국내학자들이 집필한 책이란 사실이다. 세계화 시대에 국내와 국외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국내적 관점과 입장의 관철이란 점에서 국내 학자들의 저술은 외국 학자의 명저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 장점은 책 제목에 "프로젝트"란 말이 들어 있긴 하지만 실제 이 책 자체가 일종의 프로젝트처럼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정치학 전공자가 아닌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이해 못할 대목은 거의 없었다. 세 번째 장점은 역시 책의 주제다. 우리는 미국의 강력한 그늘 아래에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형성부터 국가구성에 이르는 전과정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솔직히 요사이 MBC에서 하고 있는 "신돈"을 보면서 원의 영향을 축출하려는 고려의 몸부림이 과거의 역사에만 국한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점에서 미국의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네오콘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현실적 과제이다.
예전에 권용립 교수의 책과 강연을 듣고, 전화로 통화하면서도 실감한 것이었지만 우리 지식계 혹은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하워드 진과 노암 촘스키로 상징되는 미국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고 있다. 불행히도 이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이들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도 네오콘들을 이해하는 것은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 지난 2005년 5월부터 12월까지 위성DMB방송 "북채널"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었다. 방송의 주요 콘텐츠(예술가들의 생애와 업적)를 제공하고, 실제로 방송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들에 대해 진행자가 물어오면 답하는 그런 역할을 했다. 그곳에 꽤 많은 책들이 무료로 우송되어 오곤 했는데, 방송 연구에 도움을 얻겠다며 몇 권씩 집어오곤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송을 그만 둔 지금까지 반납하지 않고 있다. 지난 한 해 내가 유난히 바빴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고, 이른바 "투잡"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이다. 덕분에 지난 해 책 구입 비용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다.(그런데 위성DMB방송이란 DMB폰이 있어야 하는데 나조차도 그게 없어서 듣지 못했으니 과연 몇 사람이나 들었을까는 의문이다.)
하여간 그곳에서 꼭 집어내오고 싶었는데 끝끝내 집어오지 못한 책이 바로 위의 책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이다. 사실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 대해 배우면서 세계사 속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극적인 사건들로 손 꼽는 몇몇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레판토 해전이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 프랑스 대혁명을 결정적으로 뒤엎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테르미도르의 반동", 보불전쟁의 와중에 벌어졌던 파리 꼬뮌 등등이 나의 호기심을 진하게 끌어당겼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과정에 대해서는 최근 이와 관련한몇 종의 책들이 출간되었으나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이란 주제로 연속하고 있는 평전 시리즈의 첫 권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은 매우 구미에 당기는 책이었다.
흥미로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로베스피에르가 막스 갈로의 "나폴레옹" 보다 나에게는 시사해주는 바가 더욱 큰 인물인 탓도 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지음, 김태희 옮김 / 교양인 / 2006년 1월
- 2006년 1월 새해 벽두에 나온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란 따끈따끈한 책이 현재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놀라지 마시라! 이 책은 무려 1,000쪽이 넘는다. 튼실한 '각주'와 '찾아보기'만 거의 얄팍한 단행본 두께다. 앞서 "로베스피에르"를 이야기할 때, 역사의 틈새란 점에서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를 잠시 이야기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이 결국 나폴레옹의 등극을 가져왔다면 괴벨스와 히틀러는 그야말로 상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대중과 파시즘의 위험이 증대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보기에 충분한 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괴벨스에 대해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를 통해 글을 쓴 적도 있다. 특별히 괴벨스에 주목한 것은 사실상 그가 나치와 히틀러의 초기 측근 멤버들 가운데 실질적으로 유일한 지식인이었던 탓도 클 것이다. 그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은 의심하나 계속하면 나중에는 믿게 된다."라며 대중을 철저하게 기만과 선동의 객체로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활용했던 인물이다. 만약 가능하다면(나는 이미 구입했지만)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평전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는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1.2"와 "히틀러 최후의 14일"과 함께 짝을 이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김종철 옮김 / 필맥 / 2005년 4월
- 사실 얼마전에서야 이 전기의 작가인 "아이작 도이처"를 기념하는 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주의에 봄날이 왔는가"란 글을 읽다 보니 "아이작 및 타마라 도이처 기념상(Isaac and Tamara Deutscher Memorial Prize)의 공동 수상자인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과 베노 테쉬케(Benno Teschke)는 현대 자본주의의 정치 구조를 창출한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들에 관해 논쟁했다. "란 대목이 있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아이작 도이처는 마르크스주의를 속류 마르크스주의(스탈린)와 분리해내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1907년 폴란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의 분위기와 그가 공부한 학문만 살피더라도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해보인다. 그는 폴란드 공산당 당기관지의 편집자가 되어 스탈린주의와 코민테른에 반대하고, 트로츠키의 반나치 통일전선을 지지하다가 당에서 제명당한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할 말이긴 하지만(아이작 도이처에 대한 책이 있다면 좋겠다), 당시 트로츠키를 지지한 이들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숙청과정(제명과 암살 등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등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좀 더 개인적인 호기심이긴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이래 폴란드의 역사와 사회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서로 얼마간의 개연성을 지녔는가를 지적하려면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아이작 도이처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란 점에 나는 "일상적 파시즘"을 주장하는 임지현 선생을 끼어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일상적 파시즘"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한 바는 없지만 그의 주장들에서 나는 위와 같은 폴란드적 지적 흐름을 감지하곤 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러시아와 독일(혹은 다른 국가)에 의해 분할되었던 경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히틀러(파시즘)와 스탈린(사회주의)에게 동시에 침공당한 경험, 특히 스탈린에 의해 자행되었던 폴란드 지식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사건(카틴숲 사건 등)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폴란드적 역사 경험을 바탕에 깔아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작 도이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마르크스에서 시작해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이른바 '고전 마르크스주의'(classical Marxism)와 '제2 인터내셔널'에서 시작되어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속류 마르크스주의'(vulgar Marxism)로 구분했다. 이에 대해 페리 앤더슨은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라는 제2의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유럽에서 사회주의의 패배 이후 전개된 것은 노동계급 운동이 아니라 대학에 근거를 두고 정치 경제 문화가 아닌, 철학 문제, 유물론이 아닌 관념론을 중요시하는 전통 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전통은 영국적 상황(20세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상적 흐름 속에서 유럽 출신의 망명자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의 경험 못지 않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나미어(Namier), 아이센크(Eysenck), 포퍼(Popper),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등) 속에서 아이작 도이처와 결합되어 독특한 문화적 풍토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전통과 결합한 문학비평 속에서 버밍엄현대문화연구센터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많이 샜는데, 이 책에 대해 E.H.카가 했던 말은 귀담아 둘 만하다. "인간을 개인으로 다루는 것은 전기고, 인간을 전체의 일원으로 다루는 것은 역사라고 구분하는 것은 그럴듯한 일이겠고, 또한 좋은 전기는 나쁜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 사실 전기물 가운데에서도 역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작품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 분야에서도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의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전기는 그 두드러진 보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을 제외한 전기들은 역사소설과 마찬가지로 문학작품에 속한 것들입니다." 위와 같은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까닭은 이 책을 꼭 트로츠키의 전기로서만이 아니라 아이작 도이처의 저작으로 읽어내는 것 역시 로서는 매우 중요한 접근이란 생각 때문이다. 앞서 캘리니코스와 아이작 도이처의 연관성에 대해 말했는데, 두 사람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를 카우츠키나 스탈린, 코택동이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룩셈부르크와 그람시에서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물론, 아이작 도이처 자신의 다른 책들과 그 자신을 드러내는 책들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