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 정호승의 새벽편지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해냄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 아닌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폭우가 되어 쏟아지던 10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정호승 작가의 산문집 두 권과 시집 두 권을 껴안고 여수 시립 도서관을 찾았다. 참으로 행복하게 그 책들의 저자인 정호승 시인의 강연회가 있기 때문이다.

  저녁 540KTX로 도착했다는 그는 청중들과 똑같이 빗속을 뚫고 달려와 약속한 시간에 도착해 당신이 아니면 내가 없습니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알찬 그의 강의는 벌써 세 번째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하고 활자에서 느꼈던 감동을 더욱 심화해 깊은 공감을 느끼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고 고통 없는 사랑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며 모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책의 요지를 전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덕분에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되새김하며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의 산문집 당신이 아니면 내가 없습니다4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총 71편의 주옥같은 산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작가 특유의 다감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 아무런 거부감 없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빼어남을 맛보게 된다.

 

  그의 산문집 제1부는 전남 완도 찐빵집 주인아주머니의 다정한 사연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 첫 산문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라고 나에게 묻는다. 이어 내 인생의 스승 운주사 석불들에서 그 답의 방향을 제시하고, ‘가족도 희망이다에서 드디어 그 실체를 토로한다.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의 손에서 내 가슴 깊이 묻어놓은 추억과 회한의 감정 폭탄을 터뜨려버린다.

  ‘아버지는 이제 삶이라는 여행을 끝내고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나신 겁니다. 즐겁고 신나게 떠나세요. 배고프시면 가끔 짜장면도 탕수육도 사 잡수시고요.’

 

  ‘그리운 아버지의 손에서 나오는 작가의 혼잣말을 읽은 순간 나는 출렁거리는 마음의 파문을 막지 못해 그만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그 파문의 시발점이 된 말이, 삶도 여행도 죽음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짜장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 낱말을 사탕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는 군음식과 주전부리엄마 말을 그대로 옮기면, 특히 사탕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도 줄곧 사탕을 챙겨 입에 넣고 줄곧 우물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게 웃으시곤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꽤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첫 기일 때, 난 엄마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의 제사상에 사탕을 올렸다. ‘좋아하셨으니까라는 내 혼잣말에 엄마는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엄마가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가족들과 함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한 시간이 달팽이의 외유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나는 조류에 흔들리는 모래처럼 흔들거리며 올라와 내 마음을 헤집는 사탕과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비로소 삶과 죽음을 통틀어 여행이라는 말로 표현한 작가의 애틋한 마음을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병상에 누운 채 어눌한 말투로 괜찮다고 연신 말하는 엄마의 거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따스한 감촉에 안도했다 뒤늦게 울컥했다. 그다지 살갑지 않던 딸이라, 엄마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던 기억이 언제인지 모를 만큼 아득했던 것이다.

  그 순간 이 책의 한 대목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았다. 그것은 바로 아직도 세뱃돈을 받고 싶다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근간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는 작가는 애써 담담한 필체로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찾아 뵐 웃어른과 스승이 아직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찾아뵐 스승과 웃어른 보다는 제자나 아랫사람이 훨씬 더 많고, 세뱃돈을 받을 사람보다 줘야 할 사람이 대부분인 나이가 되었다는 것일 게다.

 

  꽤 두꺼운 이 책에서 삶의 편린을 가지런히 엮어가던 작가는 마지막 산문인 새해의 눈길을 걸으며에서 드디어 인생의 목적을 밝힌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사랑고통으로 압축한다. 그리고 고통이 함께하는 사랑이 진정한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시 책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새들이 집을 짓는 이유와,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는 말과, 쌀에 아무리 돌이 많아도 쌀보다 많지 않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기 위해서다. 또한 삶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이 있기에 보다 나은 삶이 완성된다는 그의 말에 깃든 위안과 평화를 다시 한 번 맛보기 위해서다.

 

  이렇게 책을 두 번 읽고 책을 덮으려던 나는 문득 또 한 번의 독서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눈으로 찍고 가슴에 담은 그림자 책이었다. 작가의 주옥같은 글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박항률 화가의 그림은 확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저 만의 아름다운 빛을 뿜어 내 마음에 말줄임표의 화인을 찍는 또 하나의 책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새를 따라 책의 맨 앞, 작가의 말로 다시 날아간다. 그러곤 비로소 빛과 어둠의 상관관계를 이해한다. 빛은 어둠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과, 빛과 어둠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사랑의 관계라는 말을 이해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비로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글과 말이 하나 된 소중한 시간을 보낸 나는 작가의 정성스러운 손 글씨가 몇 줄 더해진, 그래서 더욱 소중해진 책들을 안고 문을 나선다. 그리고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밤을 가르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되뇐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