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었다, 당신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신은주.홍순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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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쇼를 직접 가서 본 적은 없다. 그러나 TV에서 혹은 잡지에서 패션쇼 장면들을 보면, 저것이 과연 옷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옷이란 사람이 입는 건데 도대체가 패션쇼의 옷들은 입으려고 만든 것들이 아니라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패션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흥미도 없는 내가 하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란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패션쇼장을 떠올린다. 실용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기하학적인 옷들, 도저히 사람이 신고 다닐 수 없는 굽을 가진 하이힐들, 명품이라는 이름 아래 왠지 허세 부리는 듯 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 읽으라고 써놓은 것 같지 않은 소설들. 이것이 소설일까 라는 의심이 가는 소설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창작품을 즐기고 있는 독자들.

  어떤 사람이 말했다. ‘패션쇼장에서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르다. 모델이 한명씩 걸어 나오며 디자이너의 옷이 런웨이로 올라올 때마다 감전된 듯 짜릿하다. 모델들이 입은 옷은 그냥 옷이 아니며 예술 작품이다.’ 대충 이런 뜻의 문장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패션쇼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은 모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기대와 두근거림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새 작품을 마주했을 때, 막 책장을 넘겼을 때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책이 바로 나에게 그런 감정을, 두근거림을 깨우쳐 주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 분위기는 왠지 읽기 전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읽고 난 후에는 역시.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번 작품집은 단편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다음 작품을 두근거리게 했다.

  첫 단편은 독자를 방심하게 만든다. 다른 것들보다 어렵지 방식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조금씩 모래화 되어가는 인간의 이야기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소설의 각 페이지 아래마다 전혀 상관없는 듯 한 문장들이 흐른다. 그 문장들은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영화 속 장면을 묘사한 듯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는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TV를 틀어놓은 채 소설을 읽는 듯 한 기분도 든다. 제목에 있는 ‘그림 없는 삽화’라는 의미가 왠지 이 문장들을 통해 모두 설명되는 것 같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장의 그림들이 슬라이드 쇼하는 듯 내 시야를 지나가고 있었다. 

  단 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진 단편도 있다. 이건 작가가 시(詩)의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 하는 걸까? 시(詩)에서 태어난 소설이 다시 시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일까. 시는 다시 서사화되고 소설은 또 그 서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페캉에서」는 파격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소설을 잘 따라가다 보면 소설 속 주인공과 실제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이 만들어 낸 소설 속 작가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그 세 인물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는 반복한다. 자칫 방심하면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헤맬 수도 있다. 거기에 이 소설의 재미가 있다. 「이방인 #7-9」 또한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에게서 작가의 모습이 묻어난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에게 한층 가까워지게 만듦으로 다른 작품들을 더 흥미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니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주게 한다.

  패션쇼에서 보면 모델들조차 휘청거리게 만드는 하이힐이 있다. 그건 절대 길거리에 신고 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의 구두로서의 작품이다. 여기 그런 하이힐과 같은 단편이 있다. 「여자의 방」은 사실 독자에게 읽으라고 써놓은 작품이 아닌 듯 하다.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을 오려내고 붙이기를 해서 도저히 한 번에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 글을 읽으려면 번역자가 그랬듯 페이지를 잘라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만 한다. 작가는 독자들의 딱딱해진 머리를 세게 흔들고 싶었던 것 같다. 문장은 꼭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작품은 이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그나마 친절하다. 마치 단편 영화를 한 컷 씩만 보여주는 것 같다. 같은 대사와 인물을 가지고 다섯 가지의 상황과 장면에서 응용한다. 대사도 같고 인물도 두 명으로 같지만 배경이 다르다. 마치 대사만 있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각자 다른 감독들이 다른 방식으로 촬영을 하는 듯 하다. 이것 또한 한 번에 한 장씩만 넘기며 읽을 수 없고 번호를 찾아가며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왕복을 하며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지겹지 않다. 단조로운 대사와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작가가 이것을 쓸 때 진심으로 즐기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스스로가 즐기면서 썼을 때, 그것이 독자에게 전해질 때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작품처럼. 

  시작에서 패션쇼 이야기를 했다. 패션은 새 시즌마다 새로운 것들을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들은 트렌드라는 것이 되어 어떤 큰 흐름을 가진다. 그 큰 흐름 속에 얼마나 자신만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내는냐가 명품이 되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작가가 그랬듯이 이제 보수적인 작가들과는 안녕해야한다. 그리고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이 그저 이야기를 가지고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형태 자체를 들여다봐야한다. 그건 소설이라는 그 근본부터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서 시작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을 통해 대답한 것 같다. 디자이너들에게 옷이 그저 입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것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듯 소설 또한 그저 글자들로 내용들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틀까지 다시 바라보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영역이다.

  지금 우리 문단의 시(詩)의 영역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하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작가들이 많다. 시의 영역은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해졌고 한계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설에서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나 지금 『당신이, 없었다, 당신』 만큼의 파격적인 소설은 아직 접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의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소설이라는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 틀을 그들이 보기 좋게 깨고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디딘 것 같다. 그들의 시도는 그만큼 나에게 소설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고민들을 던져주었다. 그 고민들은 나를 더 다이내믹하게 해준다. 내 뇌세포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디자인은 패션이나 건축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소설을 쓸 때에도 소설 자체에 대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소설의 영역에서는 이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고 기꺼이 동참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쇼는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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