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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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소설.’

 

 

#첫인상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와, 예쁘다, 하는 것이었다. 깔끔한 단색의 표지에 로즈골드 색으로 반짝이는 제목과 글씨들. 현란한 그림이나 광고 문구 같은 것이 없어서 거부감이 들지 않고 굉장히 좋다고 느꼈는데, 책을 다 읽고 보니 글의 성격과도 잘 맞는 디자인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에 수록된 첫 작품인 파묘를 읽고 나서 에이, 재미없어, 하고 생각했다.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물과 어머니 사이의 미묘한 관계 (심지어 어머니라는 것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 인물의 독백, 자잘한 묘사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나도 모르게 책의 중턱까지 와버린 것을 발견했다. 순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흡인력이 있는 글이었던 것 같다.

 

#한국의 이야기,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외국 소설은 외국 나름대로의 맛이 있지만 우리나라 장르 문학계에서 너무 외국 것만을 따라가는 것 같아 아쉬운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서양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도 칼을 휘두르는 기사 이야기나 하이틴 섬머 로맨스 같은 것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 문학은 우리 고유의 것을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은 그것을 잘 해낸 것 같다. 6.25전쟁, 파묘 등 소재도 한국적인 것들이 많았고, 소설 속 내용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이웃, 주변 사람들의 내면 같은 것들을 창호지 틈으로 몰래 엿본 기분이었다.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보면 한없이 일상적인것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기는 한데 또 눈물을 터뜨릴 정도는 아닌. 이 소설 나름의 매력인 것 같다.

 

#담담함

사실 이 소설은 파고들어 보면, 슬픈 이야기를 참 많이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크든 작든 저마다의 고민을 가지고 살아간다. 특히 이순일의 이야기 같은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만큼 원한다면 얼마든지 신파조로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끔직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서술은 꽤나 담담한 편이다. 나는 그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순일의 삶을 가지고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얼마나 비통해해 마땅한지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슬프다기보다는 거부감부터 느꼈을 것 같다. 또한 출생의 비밀이라든지 살인 사건 같은, 일일 연속극 같은 과장된 연출이 없었던 점도 좋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여운이 길게 남았던 것 같다.

 

#조금은 어렵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장르문학에 훨씬 익숙한 나에게, 이 글은 그다지 읽기 쉬운 글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까지는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순일의 이야기를 다룬 무명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순자는 누구지? 그래서 이순일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것은 회상인가, 상상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사실 책을 완전히 이해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 내가 무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순자씨의 이야기가... 목적어가 자주 사라졌고 시간과 공간이 뒤섞였으며 다섯마디 이상으로 말이 이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 이 소설을 순자씨가 말하는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 그 노력의 일부를 소설에 남겨두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저자가 순자씨가 말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조금만 더 쉽게 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모든 문학이 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독자를 완전히 미궁에 빠뜨려버리지 않는 선에서 순문학도 순문학 나름의 길을 지켜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나름의 가치를 지닌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총평

한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그려낸 서사.

순문학이 다 이런 것이라면 앞으로 가끔 순문학을 읽어볼 법도 하다. (여전히 조금 어렵긴 하지만.)

 

#여담

사실 나는 책 앞표지 바로 뒤에 쓰인 작가의 한마디가 아주, 아주 많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무언가 굉장히 멋있지 않은가. 책을 덮고 정확히 말로는 할 수 없어도 어떤 감동을 받은 기분이었는데, 이 말이 그것을 잘 캐치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비록 책의 일부가 아니라 작가 사인 위에 딸린 작은 메모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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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하는 우리는 선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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