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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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새끼>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봤었다. 지금은 잘 챙겨보지 않아서 단어 그대로 ‘봤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에게 부모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어른이 얼마나 잘해야하는건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잘 챙겨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 마음 속에 자꾸만 ‘아휴, 저런 애들은 몇 대 맞으면 금방 고쳐질텐데.’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이다.

나는 전형적인 90년대생 아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체벌을 겪었다. 무릎 꿇고 허벅지를 맞아보기도 했고 가끔은 내복바람을 쫒겨나기도 했다. 손바닥을 맞는 건 기본이었고, 궁둥짝에, 종아리에 으레 내 또래 아이들이 맞는 것처럼 맞았다. 책에서도 그런 말을 한다. 체벌로 자란 사람은 체벌을 옹호한다고. 그 말은 꼭 나에게 하는 말이다.

청소년권리니 아동권리니, 이러한 같은 개념에 그래도 흔히 말하는 ‘어른’들 보다는 가깝게 지내며 어린이를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에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인터넷 상에서 노키즈존에 대한 찬반논쟁이 뜨거울 때에도 나는 언제나 노키즈존에 반대하며 어른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아야 한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나도 어린 시절을 다 잊어버린 어른이었다. 내가 존중하려고 했던 어린이는 어쩌면 ‘정상적’인 어린이지 않았을까? TV프로그램을 통해 비춰지는 다소 격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어휴 저런 애들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 보면 말이다.

정상이라는 범주가 얼마나 잔인한지 아는 내가 그런 생각을 잠시라도 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나 또한 정상가족에서 한끗 벗어난 비정상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교 때 별거를 시작하셨고, 얼마 되지 않아 이혼을 하셨다. 아무리 이제 이혼이 뭐 별거냐고 말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은 다르다. 특히나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때는 말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질문, 은연 중에 나오는 단어들은 내게 엄마, 아빠가 모두 있다는 걸 가정한 것들이었다. 비정상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정상이 당연한 거니까.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의 존재를 몰라준다는 게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는 겪어본 비정상인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이러한 비정상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밝은 조명 이면에, 깜깜한 곳에 자리한 사람들을 왜 알아줘야 하는지 ‘정상’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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