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알라인가, 예수인가 - 무슬림이었던 구도자,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증거를 조사하다
나빌 쿠레쉬 지음, 박명준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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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멀기만 한 당신󰡕

가깝지만 멀기만 한 당신이란 표현은 이슬람과 기독교에 알맞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두 종교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슬람은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지식은 편파적이며 부족하다. 우리는 무슬림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왜? 라는 단어가 붙지만 이해를 하지 못한다. 무슬림들이 믿는 신념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가 아닐까? 이러한 상황에서 독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자라나 후에 기독교로 회심한 나빌 쿠레쉬는 이 책을 통해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는 왜 자신이 기독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을 통해서 볼 때, 이슬람과 기독교에는 크게 세 가지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첫째, 복종과 이타적 사랑. 둘째, 코란과 성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적 무함마드와 예수다. 이 차이점들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같거나 비슷할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복종과 이타적 사랑󰡕

먼저, 이슬람의 알라는 복종,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살면서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제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종교적 제의에는 라마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기간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 실제로 2018년 월드컵에 이집트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모하메드 살라선수는 라마단 기간에 소속팀의 축구 경기가 있었으나 금식하기 보다는 라마단 규정의 예외조항을 이용하여 금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기 후에 그는 어깨 부상을 당했고 결국 이집트는 2018년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살라가 어깨 부상을 당한 후에 나타났는데, 한 이슬람 선교사가 살라의 어깨 부상은 그가 라마단 금식기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글이 올라오고 나서부터였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금식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라마단, 곧 종교적 제의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슬림은 왜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까? 그것은 코란에서 알라를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알라는 유일한 신(일위일체)이며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철저한 복종을 원한다. 이 복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복종이다. 그 어떠한 타협도 용서되지 않는다. 이렇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종말의 날에 알라가 저울을 들고 그 사람의 선행과 악행을 달아볼 때 선행을 더 많이 했음으로 그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알라에 대한 묘사는 무슬림으로 하여금 알라를 향한 철저한 복종적인 삶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반면에 기독교는 전혀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알라처럼 일위일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시며 서로 깊이 사랑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며 나타내야 하고 닮아가야 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사랑의 삶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신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알라를 향한 복종을 통해서는 인격적 관계를 누리기 어렵다. 그저 철저한 주종관계를 통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되기 때문이다. 알라는 자신에게 충실한 피조물을, 그리고 인간은 복종을 통한 천국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복종을 통한 관계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타적 사랑을 통해서 이 땅에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며 하나님을 따른다.

 

󰡔코란과 성경󰡕

둘째로, 코란과 성경이다. 두 종교 모두 각자의 종교를 나타내는 경전이 있다. 이슬람에는 코란, 기독교에는 성경이 있다. 하지만 두 경전이 각 종교에서 가지는 위상은 차원이 다르다.

코란은 계시 그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코란을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급으로 인식한다. 또한 그 어떤 오류나 변조는 없으며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았던 계시 그대로 코란에 기술했기에 영원하다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코란은 이슬람 역사에서 편집된 기록이 남아있다. 편집자가 자신의 생각대로 코란을 편집하고 나머지를 소각시킨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코란은 구술문서로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기억하고 있던 부분이 다 달라서 문맥이 고려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 역사에서 코란은 여러 모양으로 바뀌고 변화하며 오늘날의 코란으로 읽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코란이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계시 그 자체인지에는 의문이 남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술된 책이다. 그러나 코란과는 다르게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고 지금도 번역이 진행 중인 언어들도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성경 자체를 계시로 보고 보존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고 영감 된 책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은 한 사람의 저자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을 지나며 많은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묶은 책이다. 많은 저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서로가 쓴 내용이 옳다고 싸우거나 대규모의 편집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와 반대로 성경은 수많은 공동체의 고백과 인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 어느 누군가의 단독적인 편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의 고백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객관성에서도 코란에 비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역사적 무함마드와 예수󰡕

마지막으로 역사적 무함마드와 예수에 대한 기록들에 대한 분석이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 종교의 창시자,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자다. 따라서 그는 코란에 기록된 모든 이들보다 뛰어나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그의 자료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먼저, 무함마드에 대한 기록의 신뢰도다. 역사를 알기 위해선 1차 자료가 중요한데 무함마드에 대한 1차 자료는 그가 죽은 지 140년 후에서야 기록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그 신뢰성에 의구심을 보여준다. 140년이라는 세월은 얼마든지 그 내용에 수정이 가해질 수 있으며 무함마드라는 인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증인들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코란에 나와 있는 무함마드의 업적과 내용들은 당시 그 지역에서 굉장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변 지역의 문헌을 연구해볼 때, 그것에 대한 자료를 찾기 힘든 상태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선하고 강하며 능력이 있는 자로 코란에 묘사되지만 초기 그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잔인하며 극악무도한, 피를 흘리는 것을 말리지 않는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코란을 설명해주는 하디스나 이맘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인데 이로써 무함마드에 대한 역사상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예수 또한 학자들에게서 많은 평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예수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은 반대 입장에 선 학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은 것에 대한 사실을 인정한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들도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기록은 그를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목격한 증인들에 의해서 빠르게 저술되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으로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초기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수많은 핍박을 당할 때에도 그들이 싸우기 보다는 그저 핍박을 당하는, 방어적 폭력조차도 용인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근거다.

 

󰡔변화하게 된 이유󰡕

나빌 쿠레쉬는 이 책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은 내용들을 대조하며 책을 읽는 독자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판단할지를 맡긴다. 이슬람과 관련 없는 사람이 책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무슬림으로 살다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저자가 양쪽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을 설정하고 관련된 자료를 분석하여 얻어낸 내용들이기에 설득력이 강하다.

쿠레쉬는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이슬람보다 기독교를 택하게 되고 이 결정은 자신이 기존에 쌓아올린 모든 관계를 포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를 택한다.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은 타 종교를 허락지 않는 이슬람의 문화권에서 자라온 그를 변화시켰다.

기존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데도 기독교를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임에도 그가 기독교를 택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보여준 사랑과 복음은 결국 한 사람을 변화시켰고 그는 그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었다.

책의 서문에서 나온 파티마의 이야기는 무슬림 가정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 알라를 떠나는 것의 결과는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택하는 그 이유를 쿠레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교 논증을 통해서 이 책을 읽는 독자인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강력한 복종, 살얼음판과도 같은 알라와의 관계, 종교적 제의를 지킴으로써 오는 안도감을 가지고 있던 인간은 이타적인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인격적인 관계로 인하여 새롭게 변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보여주신 사랑을 알아갈 때 인간은 변하게 된다. 복종과 주종관계는 사람들 따르게 할 수 있지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이 땅에 찾아오시고 위로하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 어떤 위협에도 하나님을 따르는 신념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

앞에서 말했듯이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왜 쿠레쉬가 기독교를 택했는지를 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무슬림들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신념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행동을 기존의 우리는 몰랐기에 답답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닫혀있던 시야가 넓어지면서 우리는 무슬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론적인 면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주사위는 우리에게 던져졌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하고 이해한다. 이 책을 통해서 이슬람에 대해서 알게 된 우리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무슬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이 땅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쿠레쉬의 뒤를 이어 우리가 이슬람과 무슬림을 향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타적 사랑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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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본 그리스도와의 연합 - 바울의 구원론에 대한 석의-신학적 연구
콘스탄틴 R. 캠벨 지음, 김규섭.장성우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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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이란 사람을 생각해볼 때 그는 교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회심,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또한 그가 저술한 서신들은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설교에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바울이란 사람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바로 그가 저술한 편지들을 통한 그의 사상과 신학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 바울은 많은 편지들을 저술했지만, 그의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많은 사상들은 그의 사상이 무엇이라고 정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편지들은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 맞게 저술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주제가 바울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많은 세월동안 바울신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직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 콘스탄틴 R. 캠벨도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어구가 바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에 사용된 전치사 안에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여러 뜻으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캠벨은 말하길 그리스도 안에는 유연성 있는 바울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러한 상황을 주의하며 캠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어구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 안에라는 어구가 아니더라도 문맥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어구들을 포함하여 석의와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치밀하게 논증한다.

   캠벨은 석의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서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4가지 주제로 정리한다. 그것은 연합, 참여, 합일, 통합이다. 연합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참여는 그리스도 내러티브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 합일은 그리스도가 가진 주권에 대한 충성하는 것, 통합은 교회의 집단적 측면을 나타낸다. 4가지 주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할 때 사용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이 주제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 안에서 개별적으로 하나씩 나타나지 않고 한꺼번에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들을 통틀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캠벨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신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먼저 캠벨은 바울신학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4가지를 소개하는데 그것은 열쇠(key), 중심(centre), 바퀴 형태(wheel-shaped model), 그리고 그물 형태(a web-shaped model)이다. 이중에서 열쇠, 중심과 바퀴 형태는 특정한 주제 하나를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는 문제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바울신학의 구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물 형태가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쓴 편지들보다 더 많은 신학적 주제들이 바울서신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바울신학의 주제를 정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앞에서 주장한 그물 형태는 물고기를 잡는데 쓰이는 형태로 그물의 구조가 하나의 중심을 가지기 보다는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그물 형태의 구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각각의 신학적 주제들을 엮어주는 끈(webbing)이다. 바울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바울의 사상과 신학적 내용들을 흩어지지 않게 모아주고 분리되지 않도록 강하게 붙잡아주며 유기적으로 연결해주는 끈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캠벨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나무만을 보기를 원하지 않은 듯하다. 만일 그가 나무만을 보기 원했다면 이 책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튼튼한 끈이 아니라 열쇠 혹은 중심이라고 설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캠벨은 바울신학을 하나의 산으로 보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서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 때문에 핵심적 주제를 고르기가 어려운 상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나무 한 그루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큰 산을 바라보는 것이 바울신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여겨진다.

   산은 나무 하나만 있지 않고 수많은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다. , 캠벨이 주장한 그물 형태의 구조처럼 바울신학은 나무 한 그루로 특정되는 신학이 아니라 많은 나무들이 한데 모여서 큰 산을 이루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특정한 지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만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 올라간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캠벨과 함께 한 석의와 신학적 작업은 등산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등산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파르고 올라가기 힘겨운 길들을 따라간다. 이 책에 나오는 석의와 신학적 작업을 따라가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듯이 저자와 함께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에 대해서 고민하며 씨름하는 이 과정을 거친 후에 바울신학을 바라보면 나무 한 그루만 보는 관점을 벗게 되고 큰 산을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캠벨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바울신학을 하나로 묶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책에서 캠벨이 말한 대로 하나의 중심을 놓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는 열쇠, 중심, 그리고 바퀴형태로 볼 것인지는 독자에게 달려있다. 하나의 중심사상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캠벨의 주장은 우유부단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캠벨이 책에서 보여준 치밀한 석의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 도출한 결론이 결코 우유부단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저자와 대화를 할 수 없기에 바울신학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나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그동안의 연구사를 통해 나온 많은 자료들이 존재한다. 연구사를 통해 나온 자료들이 바울신학에 필요한 주제들이고 지금껏 많은 논의를 했음에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이제는 방법을 바꿔서 하나를 정하기보다는 캠벨이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끈을 통해서 흩어져있던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 바울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결론부에 캠벨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소개한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통해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고, 고난받고, 다시 살아나고, 영광을 돌리고, 그의 안에서 예정되고, 구속함을 받고, 그의 영역과 하나가 되고, 그의 백성들에게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향유하게 된다”(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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