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비난의 화살이 이내 책 속의 인물들이 아닌 지금 현실에 다가와 꽂힌다. 현재 방영 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속의 자폐 스펙트럼과 천재적인 두뇌를 동시에 가진 주인공과 주변 인물은 현실에는 존재하기 힘들다고 못을 박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종영한 ‘우리들의 부르스’에 출현한 다운 증후군 배우 정은혜가 실제 화가라고 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짙은 색안경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나만의 색안경일까?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낳은 엄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쏟은 우리의 세금을 아깝다 여겨본 적 있지 않은가. 장애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뿐 제대로 존중해주고 있는가. 책의 시선을 내 세계로 돌리니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은 공통된 모습에서 나는 이질감을 느끼며 불편함을 호소하고 싶어진다.
우리의 시선이 그에게도 닿은 것일까? 벤은 어느새 자신을 그냥 벤이 아닌 ‘불쌍한 벤’이라 칭한다. 엄마 해리엇은 그 이유를 모르지만, 답은 책에 있다. 엄마 해리엇은 낮은 목소리로 어린 벤을 불쌍한 벤이라 흥얼거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애들에게 했던 대로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벤에게 맞지 않은 소통이었다. 그는 세상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보았기에 엄마 해리엇은 벤을 알고 이해하여야 했다.
아빠, 데이비드는 다섯째 아이, 벤을 버렸고 투명인간 취급하며 회피하고 무시한다. 아빠뿐만이 아니다. 벤은 그런 안타까움의 시선과 경계하는 경직된 정서 속에서 자랐다. 그 누구도 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부모인 그들조차 벤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한 벤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긴장감과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고통 속에서 본인에게는 어려운 가정의 규칙들을 스스로 학습해나간다. 이제 나는 그런 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기도 고통받는지 모르는 벤을 구원하는 것은, 그를 ‘멍청이, 난쟁이, 호비트’라고 부르며 막 대하는 폭주족들이다. 벤처럼 소외된 자들이다. 벤과 같은 소수의 그들만이 남들과 다른 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겉으로 보이는 거친 언행과 달리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애정이 보인다. 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받은 경험을 통해, 거칠지만 서툰 날 겉의 방식으로 서서히 독립을 시작한다. 이제까지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힘들 것이라 착각한 나는 여전히 내가 지닌 편견을 탈피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리고 성장하는 벤과 달리 아무도 없는 커다란 집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 해리엇의 미성숙이 비교되며 안쓰러운 그녀를 마음으로 안아줬다.
나는 이제 그 누구도 비난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하고 부모의 노후자금 일부를 원조받아 집을 마련하고, 또다시 그들의 시간을 희생하며 직장으로 향하는 나는, 데이비드와 해리엇과 다르지 않다. 두 세트의 부모를 지녔던 데이비드가 꿈꿨던, 낡았지만 손보지 않은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커다란 침실이 놓인 방은 나도 꾸던 꿈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해리엇은 자신만의 진짜 가정을,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었음을 이해한다. 나도 해리엇과 다름없이 어릴 적부터 평범한 가정을 꿈꿨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의 가정, 관심과 이해가 가득한 가정,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책 속의 인물도 현실도 타인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벤처럼 성장하고 있는지, 자아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 반문할 뿐이다. 책을 덮으며 이제까지 사유한 답을 정리한다. 여전히 두리뭉실 하지만 질문을 했고,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한 첫발을 뗀 것으로 위안 삼는다. 행복한 인생의 기본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건강한 아이가 한 가정에서 지내야만 행복한 가정인 것은 아니다. 조부모와 또는 한부모 가정, 그리고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는 가정, 마음이 힘든 아이가 있는 가정 마지막으로 아이가 없는 가정 또한, 행복한 가정이다.
단지, 자신이 부모가 되기로 선택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해하여 독립된 온전한 자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나와는 또 다른 존재인 아이를 보이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듯하다. 내가 가진 바람, 그 욕구의 진짜 모습 그리고 구체적인 모습을 알고 있어야 내 선택에도 책임을 질 수 있는 듯하다. 여전히 완벽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다섯째 아이」는 나에게 집단 무의식으로 존재한 가치관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고, 내 무의식 안에 있던 가정과 부모에 대한 욕구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가진 사색의 선물을 줬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