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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우리역사 7 고려시대1 아! 그렇구나 우리역사7 고려시대1

아! 그렇구나 우리역사 7 고려 시대1

역사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삼국을 통일하여 전성기를 누리던 신라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진골 귀족들은 권력 싸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농장을 늘려 나갔고, 나라의 재정은 부족해지고, 거두는 세금은 많아지고 농민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마침내 지방의 고을들이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라가 흔들리자 중앙 정계에서도 비판 세력이 나타났다.
그 중심은 육두품세력으로 혼란한 사회를 개혁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혼란이 계속되자 성주나 장군 중에는 세력을 넓혀 새 왕조를 여는이도 나타났다.
견훤과 궁예가 각기 나라를 세우니 한반도는 다시 세 나라로 나뉘었다.
이로부터 고려가 통일을 달성한 936년까지는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왕건 가문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아버지 용건 때부터이다.
송악의 성주였던 용건은 궁예가 나라를 세우자 그에게 고을을 바치고 벼슬을 살았다.
왕건이 궁예를 처음 만난 것은 궁예가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을 때였다.
장수로 활약하면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높은 벼슬에 올랐다.
궁예는 많은 땅을 차지하자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과장했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하며 각종 의식을 거행하거나 직접 불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궁예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갔고 왕권도 궁예가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궁예에 대한 충성심도 흔들려 결국 왕건이 무력 쿠데타로 궁예를 몰아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매듭을 짓게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를 도망치다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했다.

왕건은 경주로 가서 경순왕을 만났다.
그 후 왕건이 다녀간 지 4년이 지난 935년, 쇠약해진 나라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순왕은 항복을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신라 천 년의 왕업은 막을 내렸다.
왕건은 신검을 징벌해 달라는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정벌에 나섰다.
승리의 여신은 고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수도 완산으로 가서 백성들을 위로한 뒤 송악으로 돌아옴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11대 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국내 정치도 점차 자리를 잡았다.
먼저 관직 제도가 크게 정비되었다.
관청이 중국과 같은 명칭으로 바뀌었고, 각 관청에 설치되는 관직들의 품계와 정원도 정해졌다.
외교관계도 한층 안정을 찾아 활발한 대외 교섭이 이루어졌다.
전성기 고려에게 다가오는 외부의 불안 요인이 있었다.
바로 여진족의 성장이었다.
동여진이 완옌부의 지배를 받게 되자 고려의 국경도 불안해졌다.
고려는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이다.
윤관은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실패 원인을 따져 본 윤관은 보병 위주의 군사로는 기병위주의 여진족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숙종에게 건의하여 별무반을 설치했다.
별무반은 그 동안 정규군에 편성되지 않았던 승려나 상인, 노비까지 망라했다.
그야말로 모든 국력을 모아 여진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주요 지점에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 고려의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동북 9성은 끝내 고려의 영토로 계속 유지되지 못했다.
고려를 이끌어 간 사상과 종교는 바로 불교다.
고려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발전했다.
원효는 우리 나라 불교의 학문 분야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연구는 오랜 세원 동안 서로 나뉘어 대립하던 불교계의 이론을 통합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 성과가 중국까지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나라 안에서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원효의 학문적 성과를 재발견하고 높이 평가한 사람이 바로 의천이다.
그러나 초조 대장경과 마찬가지로 속장경 경판도 전쟁의 불기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을 고르라면 원시시대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아!그렇구나 우리역사 고려편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우선, 제일 재미있게 봤던 것이 바로 궁예에 관한 이야기였다.
난을 피해 도망할 때 유모의 손에 찔려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좀 더 읽어보면 궁예에 관한 다섯 가지 의문이 나오는 데 내용이 재미있었다.
궁예 자신이 신라의 왕자라고 주장했다고 하니… 정말 우스운 일이다.
또, 궁예는 국호를 자주 바꿨다.
처음에 후고구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예는 옛 왕조 계승보다는 새로운 나라 건설 쪽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궁예의 자세가 옛 고구려 지역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몰락의 원인이 된 듯하다.
결국… 궁예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욕실 때문에 몰락되고… 불쌍한 인생 같다.
이에 반해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다.
궁예를 보며 실패를 거울 삼았기 때문같다.
4번째 의문, 궁예는 왜 스스로를 미륵이라 했을까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함으로써 지친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이끌 지도자로 자신을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태봉이 세력을 떨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지만, 도가 지나치면서 설들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유행어가 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미륵이느리라’ 대충 이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새로운 세계를 이끌 지도자로 자신을 내세웠다니…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있었나보다… 나같으면 어림도 못 냈을 것 같은데… 내.. (파일첨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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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탐구스쿨 자료실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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