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과학탐구주제 : 연날리기의 기원 및 과학적 원리 (첨부)
연날리기 , 연날리기 방패연
연의 기원
동양연의 기록
동양에 있어서는 중국 한대(漢代)에 한신(韓信)이 만들었다는 기록고 있다.
송(宋)나라 고승(高丞)의 ≪사물기원(事物記原)≫에 기록되어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기를, 이것은 한신(韓信)이가 만든 것이라 한다.
고조(高祖)가 진희(陳희)를 칠 때 한신이 중간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지연(紙鳶-종이연)을 만들어 띄워서 미앙궁(未央宮)의 멀고 가까운 거리를 측량한 뒤 땅을 뚫고 궁중으로 들어가지고 하였다.
대개 예전부터 이같이 전하여 내려온 것이므로 사유가 그럴 듯하다.
또 양(梁)나라 대청년간(大淸年間)에 후경(候景)이 대성(臺城)을 치매 내외 소식이 끊어지므로 양축(羊) 이 아이를 시켜 지연을 만들어 조서를 가운데 매고 대제(大帝)가 태극전(太極殿) 앞에서 북풍에 따라 날리어 구권군 있는 곳에 닿기를 바랐더니 적이 이것을 압승하는 술법이라 하여 쏘아 떨어뜨렸다.
이런 사실은 ≪마총통력(馬摠通曆))에 실려 있다 한다.
그러나 그 시초된 것을 여기서 볼 것 같으면 한신(韓信)이 만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한신을 연 만든 시조로 보고 있다.
한신은 중국 한(漢) 고조(高祖-유방(劉邦))의 공신으로 승상 숙하에게 발탁되어 장재(將才)를 발휘하고 대장군에까지 올랐다.
B.
C. 250년에 유방의 통일대업을 도와서 연(燕) 제(齊) 조(趙)를 차례로 명망시키고 대공으로 초왕(楚王)에 봉함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 설의 진위 또한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한신은 한(漢) 고조(高祖-유방(劉邦)) 때 사람이므로 동양에 있어서의 연은 2,200년 전에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은 양대(梁代)에도 있었다는 것은 앞에 든 기록에서도 보았다.
양의 《고조기(高祖記)》에도 그 명칭이 나타나므로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연날리기가 성행했던 것 같다.
존선조 선조 때 이졸광(李 光)의 《지봉류설(芝峰類說)》에도 소설(小說)에 말하기를, 양(梁) 무제(武帝)가 대성(臺城)에 있을 적에 어린아이가 계책을 썼다.
이 어린아이는 종이로 연을 만들어 소서( 書)를 매어 바람에 날려 밖에서 구원해 주기를 구하였다.
이제 우리 나라 어린아이들이 설날에 한지로 연을 만들어 연을 날리기를 한다.
또 고찰 하건대 당(唐)나라 노덕연(路德延)의 아잇적 시(詩)에 말하기를 실을 늘여 지연을 날린다 하였으니 그 유래가 또한 오래되었다.
이 기록을 볼 때, 당대(唐代)에도 연을 날렸음을 알 수 있다.
당(唐)의 이석선인 속박물지《續博物志》에
"이제 종이연이 실을 끌고 올라가면 아이로 하여금 입을 벌리고 바라보게 하여 열기(熱氣)를 조절하게 함이라." 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대(唐代)에 와서는 연날리기가 더욱 성행 한 것 같이 보인다.
서양연의 기록
연은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서양에서는
B.
C. 400년대에 시인 추방론과 모방론을 주장하였던 그리스의 대철학자 플라톤(Platon)의 친구인 알타스(Altas)가 연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 설의 진위는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플라톤(Platon)
B.
C. 427에 나서 347년에 죽었으니 알타스는 그 시대의 사람이므로 서양에 있어서의 연은 2,400년 전에 있었던 것이 된다.
한국연의 기록
우리 민간에는 연의 기원에 대하여 전해 오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崔瑩)장군 탐라(耽羅-제주도)의 목호(牧胡-蒙古人으로서 목축하는 자)의 난을 평정할 때에 병선이 탐라에 근접하였으나 주위가 절벽이라 한 꾀를 내었는데, 수 많은 큰 연을 만들어서 그 연에다 불을 달아 지자성(枳子城)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병사를 큰 연에 매달리게 하여 병선에서 이것을 날려 그 성을 공약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간단하기는 하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上元) 조에 諺傳昉自 崔瑩伐耽羅之役 이라 하여 "속설에 최영장군이 탐라를 정벌할 때에 시작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 시원을 최영의 탐라 정벌 때부터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선덕여왕 16년(서기 647)은 왕이 돌아가신 해이고(정월 8일), 진덕여왕이 즉위한 해이다.
대신(大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은 여왕으로서는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며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므로 왕은 친히 궁내에서 이를 막았다.
이 때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주둔하여 서로 치고 막기를 10여 일 동안 하였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는데, 병진(丙辰)날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 등은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패망할 징조라" 하자 군사들이 큰소리를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여왕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을 때, 김유신 장군은 왕을 보고 말하기를 "길(吉)하고 흉(凶)한 것은 무상한 것으로서 오직 사람이 그렇게 여겨 올 따름입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지덕(知德)은 요망(妖妄)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온즉 성진(星辰)의 이변 따위는 그다지 두려워할 것이 아니오니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너무 걱정 마옵소서"하고는 곧 우인(偶人-허수아비)을 만들어서 연(鳶)에 달고 이를 바람에 따라 띄우니 불덩이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그 다음날 사람들을 시켜 길가에서 선전(宣傳)하기를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간밤에 도로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하여 적도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들고, 또 백마를 잡아서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고 …… (중략) ……이에 유신(庾信)은모든 장병들을 독려하여 적을 공격하니 비담의 무리가 패주하므로 이를 격추하여 모조리 몰살하고 그 구족(九族)을 죽여버렸다.
≪三國史記(삼국사기)≫(卷(권) 41) 열전 제일 김유신(金庾信) 상조(上條)
둘째, 삼국시대에 전쟁이 있었을 때, 자기 편끼리 진지 사이에 통신 연락의 한 방편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그 기원을 삼국시대로 보는 이가 있다.
셋째, 당(唐)나라 안록산(安祿山)이 궁중의 양귀비(楊貴妃)와 내통(內通)하기 위하여 연(鳶-솔개)을 만들어 띄운 데서 비롯되었다는 외래설(外來說)이다.
연날리기의 놀이방법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신분, 연령의 구분없이 즐겨오는 놀이다.
대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연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여 연을 만들고 살에 매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날린다.
때로 다른 사람과 서로 연실을 부벼 끊는 연싸움을 하기도 한다.
연을 띄울 때 `송액영복`이란 글자를 써 붙이는데 이것을 질병, 사고, 흉년 등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고 복이 찾아오도록 비는 마음에서이다.
우리 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시대의 영조왕 때라고 한다.
영조왕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했고 또 장려하였다고 한다.
정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게된 이유 중 하나는 일 년 사계절 중 이때가 연날리기에 가장 적당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연날리기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이 즐겼으며, 연줄을 서로 엇갈리거나 닿게 하여 다투다가 다른 사람의 연줄을 끊는 연싸움도 즐겼다.
그래서 연싸움을 즐기는 사람은 연줄에 … (첨부)
..... (중략:첨부파일 클릭 바랍니다)




제목 : 쉬운과학탐구주제 : 연날리기의 기원 및 과학적 원리 (첨부)
출처 : 탐구스쿨 자료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8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연날리기의 기원 및 과학적 원리
파일이름 : 연날리기.hwp
키워드 : 연날리기,방패연,연날리기,기원,과학적,원리
[관련자료]
-
놀이기구에 숨은 과학적원리 와 연구-
봉숭아 물들이기의 원리와 여러 첨가제의 작용-
낙하 물체의 속력 측정, 만유인력과 쏠림힘과의 관계 탐구-
전자파가 우리 몸에 과연 해로울까?-
죽어가는 선인장 살리기-
갈변현상을 막는 과일 저장 방법에 관한 실험-
과일 및 채소 전지의 원리와 실험-
꽃을 더 오랫동안 보관을 할 수 있을까-
드라이아이스 성질을 이용한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