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안정효 / 오늘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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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자신도 헐리우드 키드였다는 식의 말로 글을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그 풍경들을 통해서 나는 현실의 누추함을 견디어 나가는 환상의 방법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본 하늘은,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와는 달리 마치 물감으로 검은 칠을 한 것처럼 딴 세상의 하늘이었다.'

영화관이 있는 도시에 살았으므로 '현실의 누추함을 견디어 나가는 환상의 방법론'을 배울 수 있었던 첫 세대가 안정효 세대, 즉 이른바 4.19 세대라고들 하는 것같다. 그들에게, 현실의 누추함에 대비되는 환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이었을까. 안정효는 <가난한 세월의 풍요로움>이라는 제목으로 '작가 후기'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정신적으로는 삭막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가난한 삶이 차라리 비옥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이가 50이 넘어 버린 지금, 나는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잠깐 질투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한 말이었다. 과연 이 소설에는, 영화에 혼을 빼앗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게 혼을 빼앗길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건, 대체로 '현실의 누추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가 지천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그게 무엇이든 넘치면 넘치지 모자람이 없는 세상이니까, 혼을 빼앗기기는커녕 고마운 줄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내 아버지 연배 사람들의 '문화사적 자서전'으로서 당시의 영화광과 오늘날의 영화광들이 어떻게 닮아있고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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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 나남창작선 114
안정효 지음 / 열음사 / 199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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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서도 번역가로서도 역량을 발휘하는 안정효씨의 단편집이다. 탁탁 끊기는 듯한 묘한 매력의 문체는 아마도 작가의 오랜 기자생활이나 번역가로서의 경력에서 나오는 자산이라 생각된다.한 번 걸려든 물고기를 좀 더 확실히 낚기 위해, 낚시 바늘에는 뾰족하게 가시 하나가 돋아 있다. 그것이 바로 미늘, 그렇게 걸려든 물고기는 다시 빠져나가지 못한다.

'미늘'의 주인공 구찬에게 있어 미늘은 무엇일까. 항상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그의 소심한 성격? 아니면 놓아줄 듯 놓아줄 듯 그를 물고 늘어지는 수미? 그것도 아니면 그를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 그 미늘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걸려든다. 그리고 꼼짝달싹하지 못한다. 우유부단한 그가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그 앞에 나타난' 죽음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그는, 안도할 수 있고 일시적인 도망자가 될 수 있다. 결국 그는 혼자서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일은 엉성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이제 '미늘의 끝'이란 속편격의 소설도 나왔다고 하니,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심경이다. 무엇보다 구천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 선택이 이끌어낸 결과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밖의 단편인 '황야'나 '미국인의 아버지'에서도 안정효 특유의 냉정한 관점을 듬뿍 감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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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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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는 말은 비단 예술가들에게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들으면 충격을 받을 말이다. 깊이가 없다니? 이런 말을 듣는다면, 자신의 사고와 행동방식등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질 것이다. 물론, 내가 어때서? 하면서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말에 상처를 입는다. 더구나, 그런 지적이 다수의 사람들이 보는 언론매체를 통해서 행해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재능있는 여인에게 가해진 친절한(?) 지적은, 결국 평론가의 의도에 관계없이 그녀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녀는 죽어서 조차 사회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나친 깊이에의 강요가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짧고도 예민한 문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개인 탓으로 돌리는 평론가의 말은 말그대로 아니러니 그 자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묘한 색깔이 느껴진다. 청회색빛과 같은 그런 색깔.그래서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우울하지도 않고...그냥 내 주위에서 내가 생각하는 일들을 좀 더 명확한 문장으로 표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쥐스킨트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는 큰 이유중 하나이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큰 선물이 될 만한 작품이라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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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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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콘트라베이스 주자는 처음에는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빠져서는 안돼는 기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기본이지만, 음감 자체가 일반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게 들리지 못하기 때문에 독주 악기로써 나설 수도 없고,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깔리는 중요한 소리이지만 기술적으로 노력할 필요도 없는 힘의 악기라고 한탄한다. 독주연주자들에 비해 보수도 적고, 각광도 못 받는 침체된 그의 삶에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은 같은 악단에 근무하는 소프라노 가수 사라. 그의 존재 유.무도 모르는 그녀를 그는 짝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사랑 고백을 해보려 결심하며 끝을 맺는다. 서양 대중 음악에 베이스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베이스 음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어도 현실감 있게 와 닿지는 않는다. 역시 귀를 단련시켜야 하는지...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사회 속의 콘트라베이스 주자. 이미 자리(권력)의 위치가 짜여져 있는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이 가진 또는 살아가는 재능. 지금까지의 사회는 언제나 불평등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 공산주의가 탄생되었지만 그곳에서까지도 존재한 소수의 특권층과 무경쟁으로 인한 도탄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지금까지의 사회체제들은 근면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재능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체제가 나올는지 정말 궁금하다. 작가의 글 속 주인공들은 나름대로 살아가지만 참 고독해 보인다. 일반 책들은 그 고독함의 타개책으로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결말을 맺지만 이 작가의 책에는 그런 독자서비스가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론, 작품 속에 주인공들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쓸쓸함과 사랑. 고독에는 역시 사랑하는 이의 충만한 애정만이 해결책일까? 독자 개개인에게 각자의 결말을 요구하는 그의 글은 그들에게 애정을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을 남기는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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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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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중 유일하게 내 책장에 꽂혀 있지 않은 책이면서 유일하게 내가 주인공에게 소위 '감정 이입'이란 걸 느꼈던 책이다. 글쎄 그의 다른 작품들도 좋아하긴 하지만 대부분 그 주인공들과 나 사이에 어떤 거리감같은 것들이 있어 '동일시'를 절대적으로 막는다면, 비둘기의 이 신경쇠약 증상으로 가득한 남자의 미친 고민은 내 성격의 일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흠흠. 나는 '대충 해, 대충!' 하는 대범한 성격과 함께 지나치게 소심하고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고 집착하고 신경질적으로 많이 고민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다. 두 극단적인 성격을 다 갖고 있다는.... 에헴) 그 두 번째 성격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주인공의 성격이 저렇다는 말이다.

사실 누구나가 약간은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런 성격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약간은 공감이 갈 것처럼, 그만큼이나 속을 '후벼 파는' 핵심을 지닌 심리 묘사 재주를 발휘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게다가 실제로 이 비슷한, '소심한'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미친...' 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이건 나야' 하고 찔려한 장면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렇다고 내가 조나단처럼 그런 심한 강박증과 소심증에 시달리는 정서 불안자는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니 더 소심해 보인다.

남에게는 별 큰 일이 아닌 것 같지만 그 사소한 것 하나를 가지고 머리 속에서 굴리고 굴리며 걱정하다 보면 생각이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고민이 끊이지 않고... 남들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행동을 하기 위해 혼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해내지 못하고 그 바람에 어떤 손해를 보고 마는... 결국 그 손해 덕분에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 스스로를 탓하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나단의 머리 속에서 생각들이 점점 미친 듯이 이어져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치밀하고 - 상당히 기가 막히는 과정이긴 하지만-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음, 그걸 공감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굳이 해 볼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런 줄 아시길.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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