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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릿 - 한동원 장편소설 ㅣ 담쟁이 문고
한동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한동원, 『삐릿』, 실천문학사, 2009.
순식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작품을 읽었다. 어떤 내용이 있는지, 어떤 문체로 쓰여있는지 확인만하려 했을 뿐인데, 어느덧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퇴근길에 몇장만 보려고 했는데 씻지도 않고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희한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푹 빠져서 책을 읽은 것은. 저절로 집중이 되는 작가의 문체는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작중 인물에게 흠뻑 몰입되게 하는 마력을 지닌 듯 하다. 게다가 탄탄한 플롯 구성, 스토리 전개는 물론이고 곳곳에서 나오는 지식-예를 들어, ‘모던 토킹’이라는 가수, 'Like Hell'이라는 락 음악,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대성당 나무’ 등- 을 기어코 찾아보게 만드는 재주는 이 작품으로부터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토록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서처럼 “난 당신의 호기심을 믿어.”라며 슬며시 웃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다 작가의 손바닥에서 논 셈인가. 어쨌든 음악과 기타 등에 박식한 독자라면 자동적으로 배경음악이 깔리겠지만, 나같은 평민들은 일일이 찾아서 BGM으로 깔아놓고 책을 읽어야 했다. 그렇지만 전혀 귀찮지는 않았다. 순전히 내 호기심때문이었으니까.
‘딴따라 플레이’, 이 작품은 ‘딴’, ‘따라’, ‘플레이’라는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 기타를 접하고, 비록 오프닝 무대이기는 하지만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20대 이상의 모든 독자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어쩔수 없다는 듯이 학창 시절을 떠올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주인공인 ‘백동광’에게 몰입되는 나를 돌아보며, 작가의 인간을 통찰하는 능력이라든가, 인물 사이의 심리적 관계파악 등이 상당히 뛰어나고 섬세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단순히 ‘밴드’를 결성하고 이를 진행해나가는 철없는 ‘고삐리’들의 이야기로만 치부하지는 말아야한다. 학생들을 앞세운 어른들의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이라든가, 부조리한 사회상 등도 제법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끼리의 ‘편지’를 매우 유용한 소설 도구로 쓰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난 부분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게슈타포도 널 팬 게 아니고 음악 선생 이하 교내 딴따라 세력 중 한 놈을 팬 거다. 넌 희한하게도 양 쪽 모두한테 본보기 삼아 당한 거야. 어쩌면 너야말로 조직에 속하지 않은 개인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X같음을 몸소 보여준 교과서적 인물인지도 모른다. 똥광 이 불쌍한 새끼...”(360쪽) 흥겨운 내용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370여 페이지의 긴 분량이지만, 끝나는 것이 마냥 아쉬운 짧은 이야기. 이 매력적인 소설과 작가 한동원의 앞날에 찬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