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와 소설의 공통점은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와 달리 "허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영화계와 소설계에 조금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하다. "사실을 근거로 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영화 <킹콩을 들다>가 어느 여자중학교 역도부의 실화를 다뤄 눈물을 쏙 빼놓더니, 영화 <국가대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스키점프"국가대표팀의 이야기로 스키점프라는 종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적 상상을 가한 소설을  '팩션'이라고 하는데, 사실과 허구를 50대 50으로 본다면, 독자가 그 소설을 사실에 가깝게 인식할때 성공한 팩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 <바람의화원>을 읽고는 이게 소설이야, 실제야 하며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급기야 역사적 인물인 신윤복을 아예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게 된 걸 보면, 그 소설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망을 무너뜨려버리는 쓰나미급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몇 백년이 지난 역사 이야기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가 사실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역사적 자료가 사실을 뒷받침해주겠지만, 거기에 허구적 상상을 가미해, 실제보다 더 실제로 믿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능력이다. 한마디로 작가가 부린 마법에 따라 독자는 마치 소설 속 내용이 진짜가 아닐까 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소설 <제국의 역습>이 그랬다.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 야욕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이 사실은 조선에서 보낸 밀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 어쩌면 그 상상은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끔 작가는 묘한 마법을 걸어놓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건을 풀어가는 인물이다. 코난도일이 만들어낸 "셜록 홈즈"나,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의 히어로인 "에르큘 포와로" 같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물이 친근한 우리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박명준"! 뛰어난 통찰력과 냉철함을 가진 우리식 탐정이다.  시간적배경이 17세기이니 수사를 진행함에 있어 과학적 수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공간적 배경이 일본이니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완벽하게 사건을 풀어낸다. 그의 시선을 통해, 아니 "전지적 작가시점"을 통해 더 많은 사실을 인센티브 받으며 사건을 들여다봤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마지막에 박명준이 사건을 풀어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의 무지몽매함이란... 사실 이런 소설 속에서는 무지한 독자가 되어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재미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박명준이라는 인물이 말할때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말하는 독특한 버릇을 부여한 걸 보면, 어쩌면 이 사람은 1회용 주인공이 아닌, 시리즈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된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 감에 있어 점점 거미줄처럼 얽히는 이해관계들이 주는 긴장감, 그 이해관계들이 하나씩 풀려갈때의 희열, 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지는 반전의 재미. 그 반전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아 오히려 유쾌하고, 결말까지 가는 과정에 충분한 복선이 있었음에도 놓친 것에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제국의 역습>이라는 소설 속에 담긴 또 하나의 금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덧 그 금서 속의 내용을 읽고 있도록 만드는 이중적 구성도 신선하다.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 정세에 대해 세상이 모르는 은밀한 비밀을 작가에게 몰래 전해들은 것 같은 이 기분. 그래서 나 또한 그 비밀을 누설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책임감이 드는 이 느낌. 이 소설이 주는 유일한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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