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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의 열심
박영선 지음 / 무근검(남포교회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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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최대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하기에 매 선택의 순간에 기도로 하나님께서 찍어주셨으면 하고, 오늘날에는 AI를 이용해서 성공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선택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최선을 다해보지만,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혹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항상 진심을 이야기하고, 목숨을 걸고, 부모님들을 소환해서 맹세를 합니다. 나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자기는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고,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에는 매우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진심을 만들어낼 능력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걸 아십니다. 그걸 아시지만,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양을 먹이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일의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 결과가 어찌되는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요셉처럼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다짐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무엇을 이루시는지를 함께 보았으면 합니다. 전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별먼지를 모아서 만든 내게 이리도 관심을 가지시고, 이렇게 사랑하셔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훌륭해지려고 살지 않아도 되는 삶, 결과를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삶,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49살에 세 번째로 읽는 ’하나님의 열심‘은 그간 내가 그토록 노력해온 ‘훌륭해지려는 열심’은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 존재이기를 원했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고, 언제나 나의 주인이시길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가 거부한다고 노선을 변경하시지 않으시는 영원토록 고집스러운 분이심을 알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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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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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이나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그걸 통해서 지금 내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 혹시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접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들 혹은 그 상황을 단지 ‘특이한’ 것으로 치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저는 앞선 반응을 하는 것은 ‘환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동성부부’ 혹은 ‘혼외아동’ 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살아가기 힘든지를 보았습니다. 도대체 ‘정상적 가정’이라는 것이 뭐기에 그것이 깨지는 것을 이리도 두려워 하는 걸까요?

대한민국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 하는 ‘국민’이라는 사람들에게만 어떠한 권리가 주어집니다. 물론 그 ‘국민’도 어떤 혜택을 받으려면 - 예를 들어 장애인 판정이나 부양의 도움 - 내가 그 도움을 받을만큼 내 가족이 충분히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이웃이 아니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 존재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를 기본으로 구성되는데, 그 아버지, 어머니는 반드시 남성, 그리고 여성이어야 합니다. 성별이 이미 정해진 이 가족이라는 각본에서 아버지가 여성이 되든지, 어머니가 남성이 되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말입니다.

저는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이 출산율 저하를 대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0.76까지 낮아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낮은 출산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가 태어나서 환영받지 못하는 나라라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출산율이 낮으면 나중에 보험금 부담이나, 연금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에 출산율을 늘여야 한다는 논리는 철저하게 지금의 기성세대들의 이기심이 아닐까 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럼 아이들은 이런 의료보험이나 연금부담을 지기 위해서 태어나야 하는 거냐는 질문이 가슴에 남습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일갈합니다.



사람을 그 자체로 존엄하게 여기지 못하고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에 기꺼이 태어날 아이가 있을까. 자신이 어떤 삶의 제비를 뽑을지 모르는 불평등한 세상에 나오기로 마음먹는 일이 쉬울까. 어쩌면 지금의 낮은 출생률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존엄하고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아이들의 절박한 집단행동일지도 모른다. (p.64~65)


대한민국은 각 개인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과연 관심이 있는 것일까. 를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는데, 부양의 의무나 혹시나 발생하게 될 상황은 오로지 가족이 떠맡아야 됩니다. 도대체 ‘국가’란 무얼 하는 곳일까요?

아이 부양은 당연하게 여성들에게 도맡게 하고, 남성들은 야근까지 시키면서 철저하게 수탈하는 상황. 국가는 이들에게 한푼이라도 더 세금을 걷고자 하고, 도대체 그 세금은 왜 이 땅에 사는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쓰려고 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경제, 돈 이런 것에 취한 미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누구도 모든 부분에서 다수에 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당신이 예상하지 못하는 어느 부분이나 어느 순간에 소수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수에 속하게 되어도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현재 대한민국은 그 양 한마리를 찾는데 비용을 계산하면서, 아직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있으니 이를 지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돈으로 계산되는 이 사회.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는 다윈의 자연선택의 이론처럼 점점 도태되다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같이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심플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고 다시 메아리가 되어 내 귓전을 때립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잔고에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지요.


사람을 그 자체로 존엄하게 여기지 못하고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에 기꺼이 태어날 아이가 있을까. 자신이 어떤 삶의 제비를 뽑을지 모르는 불평등한 세상에 나오기로 마음먹는 일이 쉬울까. 어쩌면 지금의 낮은 출생률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존엄하고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아이들의 절박한 집단행동일지도 모른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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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로마서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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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책읽기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공대생이 이책을 시작한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 책을 다 읽었다는 것에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성경이라는 문서에 대한 문서비평이 먼저 시작되었다.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지 (쓰여졌는지), 또한 언제, 왜 저술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된다고 하겠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다. 당연히 사실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가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기술된 사건들 하나하나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면 마치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간 우리가 교육 받아온 기독교 근본주의의 의견일 뿐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사상적 기반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내려오는 아테네 문화의 학풍을 설명하고,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의 서신들과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는 4복음서 저자들의 공관복음의 차이,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온 인류의 지혜를 요약한 바울의 의견인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복음인지를 구별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쓰여질 때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기술할 수 없고, 그 기술에는 저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느라 도올 선생은 전체 500페이지가 넘는 책 가운데 거의 절반은 250페이지를 할애했다.
바울은 살아있는 역사적인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그거 만났다던 예수가 꿈에서인지 환상의 형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든 직접 생활하면서 겪은 적은 없다. 누가 누구를 잘 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친한 사람이어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너무 친한 사람은 그의 가치를 다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는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를 같이 했지만, 철학적으로 아니 쉽게 사람들에게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바울의 경우 신약의 많은 부분을 그의 신학적인 이야기로 채우고 있는데, 로마서에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와 그리고 당시의 민감한 사항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위축되지 않고 피력하고 있다. 이는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한 발 빠져 있으면서 근본적인 이야기만 하는 많은 기독인둘에게 도전적이라 허겠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복음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은 이걸 알고 전하고 있을까? 마치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문서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역사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까지 거부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 라는 것은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선고받을 수 없고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값없이 의롭다 칭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늘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야 하는 과정.. 그러면서 주님과 늘 다시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도올 선생은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이 차이가 있고,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차이가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며 달을 보지 않고 손만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 진실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대각의 과정을 지나게 되는 고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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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로마서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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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책읽기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공대생이 이책을 시작한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 책을 다 읽었다는 것에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성경이라는 문서에 대한 문서비평이 먼저 시작되었다.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지 (쓰여졌는지), 또한 언제, 왜 저술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된다고 하겠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다. 당연히 사실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가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기술된 사건들 하나하나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면 마치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간 우리가 교육 받아온 기독교 근본주의의 의견일 뿐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사상적 기반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내려오는 아테네 문화의 학풍을 설명하고,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의 서신들과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는 4복음서 저자들의 공관복음의 차이,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온 인류의 지혜를 요약한 바울의 의견인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복음인지를 구별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쓰여질 때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기술할 수 없고, 그 기술에는 저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느라 도올 선생은 전체 500페이지가 넘는 책 가운데 거의 절반은 250페이지를 할애했다.
바울은 살아있는 역사적인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그거 만났다던 예수가 꿈에서인지 환상의 형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든 직접 생활하면서 겪은 적은 없다. 누가 누구를 잘 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친한 사람이어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너무 친한 사람은 그의 가치를 다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는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를 같이 했지만, 철학적으로 아니 쉽게 사람들에게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바울의 경우 신약의 많은 부분을 그의 신학적인 이야기로 채우고 있는데, 로마서에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와 그리고 당시의 민감한 사항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위축되지 않고 피력하고 있다. 이는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한 발 빠져 있으면서 근본적인 이야기만 하는 많은 기독인둘에게 도전적이라 허겠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복음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은 이걸 알고 전하고 있을까? 마치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문서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역사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까지 거부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 라는 것은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선고받을 수 없고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값없이 의롭다 칭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늘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야 하는 과정.. 그러면서 주님과 늘 다시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도올 선생은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이 차이가 있고,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차이가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며 달을 보지 않고 손만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 진실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대각의 과정을 지나게 되는 고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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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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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이 넘은 늦은 나이에 클래식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 조금 챙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이런 세계를 알게 된 것도 감사하다.
교향곡은 화려하지만 아직은 좀 어렵고 쉽게 다가오는 건 역시 피아노다. 가볍고 친근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바이올린, 그 다음으로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첼로 협주곡에 익숙한 다음에야 교향곡이 좋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듣기 좋네~ 아름답네~ 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수준이지만, 전문가도 아니니 뭐 이 정도로도 족하다.
손열음은 KBS "더 클래식"에서 처음 만났다. 나중에 보니 워낙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는 걸 알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성진보다는 손열음의 연주가 조금 더 좋다. 뭔가 모를 스토리가 있다고나 할까?
책을 보고 알았지만 중앙일보에 5년간 칼럼을 연재한 걸 책으로 엮어냈다. 나와는 다른 아니 일반인들과는 다른 아티스트의 삶,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까? 했지만 예상외로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어려서 피아노 치는 시간 외에 책만 읽었다는 게 느껴지는 필력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친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
어릴 때 혼자 캐리어를 들고 콩쿨을 다니고 지금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연주 생활을 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서른의 적지 않은 나이의 연주자.. 그의 음악 이야기 그리고 친구 이야기, 은사 이야기.. 내가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진지하게 매 순간을 대하고, 솔직하게 음악을 대하는 그 자세는 동일하게 삶 속에도 묻어나 있다. 그래서 손열음과 마치 커피숖에 앉아서 그간의 경험에 대해서 싯컷 수다를 떨었다고 아니 들었다고 느껴질만한 그런 책이다. 흔한 클래식 책처럼 음악을 소개하거나 하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주는 아니다.
책이든 음악이든 삶이든 내 안에서 완전히 녹여낸 후에 다시 음악으로 삶으로 들려지고, 살아진다는 거 그 자체에 진실의 힘이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뭉클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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