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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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시한 사랑 이야기>

 

화교중학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3 때 어느 학원에 등록하면서였다. 레벨 테스트를 통해 반에 배정됐는데, 무슨 사정이었는지 그 반 아이들은 온통 화교중학교 출신이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화교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고, 화교들만 다니는 학교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좀 어리둥절한 상태로 교실에 앉아있었는데, 행정 업무를 보던 직원이 수업 중에 들어와서 나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반에 배정되었으니 교실을 옮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 몇몇 아이들이 대놓고 아싸!”를 외쳤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기쁨을 표현하는 그 아싸가 맞았다. 어린 맘에도 그 원색적인 표현에 상처받지 않았던 건 그들이 요샛말로 진짜 아싸(아웃사이더)”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회의 어엿한 성원이고. 너희들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구분 속에 살 거니까. 지금의 나를 향한 배척 정도야 이 나라의 떳떳한 인싸인 내가 너그러운 맘으로 봐줄 수 있다는, 뭐 그런.

 

리뷰를 쓰기로 했을 때 그 화교들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악의(惡意)였다. 작가가 줄곧 시달렸다고 하는, 이 책의 온갖 등장인물들이 품고야 마는. 그때는 살면서 의도치 않게 품고야 마는 악의란 게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 커서야, 그리고 책을 읽고서야, 그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화교들의 생존에 다양한 조건이 붙는 시기(281)를 지나왔을 것이 보였다. 대를 거듭해서 들러붙는 핍박에 시달리다 보면 그 당사자들이 품게 되는 악의라는 건 보통 사람들이 품는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압축된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화교인 뢰이한에게는 그런 앙심이 보이지 않는다. 받은 것보다 더 크게 돌려주고야 말거라는 원한이. 대불호텔 속 모두가 그런 원한을 가지고 있다. 대불호텔의 이야기를 들려준 박지운은 남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한다. 대불호텔의 접수원인 고연주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다 좌절하고 함께 지낸 친구를 원흉으로 보고 저주한다. 남의 인생을 빌려 쓴 지영현도 확확 뒤집히는 세상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자기 인생을 비참해하고 있다. 그 와중에 뢰이한만이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난 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 같았다. 엉뚱하게도.

 

뢰이한을 주인공으로 보면 한()으로 버무려진 채 시작된 이 소설이 결국은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이곳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그들의 일부이고, 그들 역시 저의 일부이지요. (중략) 저는 단지 박지운과 제 아이에게 제가 만든 음식을 먹이고, 제가 산 옷을 입히고 싶어요. (중략) 형님, 저는 행복합니다(284).” 실질적 고향인 이 땅에 대한, 이곳에서 만든 처자식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은 뢰이한을 통과한 멸시와 배척이 더 추악한 모습으로 배설되어 나오는 것을 막는다. 대단한 원한이 사랑 앞에 힘을 잃는다. 시시한가. 사실 대다수의 인생이 그렇지 않나.

 

살아내는 것이 원한과의 맞닥뜨림 같을 때가 있었다. 책의 말마따나 그것들은 언제나 나를 선택(234) 하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까지는 딸인데도 많이 배우고 유학까지 간다며 비아냥거리고 무시하는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써댔다. 취직할 땐 말을 배설하듯 쏟아내는 남자 면접관과 그 면접관과 비슷한 수준으로 답해도 합격하는 남자 면접자를 향해. 결혼하고 나서 마주친 그 모든 부조리의 종합세트를 향해선 참담함에 입을 다물었다. (. 나는 지금 대불호텔이 삐걱대던 1950년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가끔은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 다 평화로워 보이는데. 망할 것들. 하면서.

 

그러나 악의? 그까짓 것들(295).”이라고 되받아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내 곁의 사람들을 용서하고 나아가는 순간들은 늘 또다시 온다. 날 잡아먹으려 들던 거대한 무언가, 내가 품었던 그 위험한 감정들을 생각하면 다시를 외치며 살의를 내려놓는 순간들은 얼마나 시시한가. 하지만 그 시시함 때문에 도저히 살아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을 연명해낸다.

 

표지부터 악의, 저주, 귀신, 심령, 호러라는 소개 단어들이 무시무시하지만 속지 마시길.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에 끝날 걸 알아도 시작하고야 마는. 적자생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로 표현되곤 하는 세상 속에서도 결국은 인류를 이만큼 지속시키고야 말았던 사랑.

 

나는 그 사랑을 담아 작가 강화길을 응원할 것이다. 음복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이 작가가 이보다 더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이제는 더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확신으로 그가 내놓을 작품을, 그전의 작품을 읽어갈 것이다. “매혹당했기 때문에(84)”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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