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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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 책의 제목에도 쓰여있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산 사람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를 놓고, 사탄이 하나님께 질문한다. '과연 그의 믿음이 진짜일까?' 영적 영역에서 시작된 이 불씨가 그의 현실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까닭은 알 수 없는 욥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그냥 고난이 아니라, 재앙이다. 모든 것을 잃고, 병까지 얻는다. 그의 현실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욥은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더 아프고, 더 괴롭다.


우리, 감히 욥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인과관계가 분명한 현실이 아닌, 역설과 아이러니가 가득한 현실 말이다. 아무리 원인을 찾으려 해도 결국 헛다리 짚게 되고, 이에 무기력해지고, 좌절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이런 현실 앞에 까닭을 묻는 것도 사치일 수 있다.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저 말 못 할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욥이 입을 연다. 그리고 까닭을 묻기 시작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고통에, 그의 현실에 누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말 못 할 슬픔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고, 그의 가슴속 깊은 울분은 들어줄 '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엔 아내가 있었다. 그가 겪은 고난을 함께 겪고, 그의 침묵 속 아픔과 애통을 지켜봐 준 아내가 있었다. 그의 '곁'에 존재한 아내는 욥이 침묵 속에 홀로 괴로워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께 욕이라도 해서, 그 아픔을 입 밖으로 내게 한다.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다시금 길을 만들어 가게 한다.


곁은 그런 힘이 있다.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 말문이 닫혀버린 사람들에게, 세상과 단절한 사람들에게 다시금 말을 하게 하고, 세상과 직면하게 한다. 이런 존재는 알 수 없는 현실 속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갈 수 있는 힘이 된다. 하지만, 모든 곁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려 하고, 인과관계를 찾으려 하고, 까닭 없는 고통이 없다며, 그 원인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때론 독이 된다. 이러한 '곁'의 존재들은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이성적 틀과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속에 그 고통받는 자를 짜 맞추려 한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운데, 그들이 만든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서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은 한 번 더 죽는다.


하나님의 곁에 있던 사탄은 욥의 믿음에 원인을 찾으려 했고, 욥의 곁에 있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들의 시도는 결국 함께 있는 이를 괴롭게 한다. 욥의 친구들은 나름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욥이 극심히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한동안은 그의 곁에서 함께 울어주었던 이들이다. 이들 역시 욥의 고난이 끝나고, 욥이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을 찾는 과정 속에 욥은 객체화된다. 원인을 찾는 과정 속에 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사라지고, 정죄와 판단만 남는다. 그 모든 것이 욥을 더 깊은 괴로움으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씨름 속에서 점차 회복된다.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억눌렸던 감정을 토해내며, 숨통이 트이고, 회복되기 시작한다. 과할 정도로 자신의 결백을 토해내는 그의 모습 속에서 삶의 의지가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결연함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는 다시 살아난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에 자신의 답을 내놓으려 한다.


친구들이 욥의 현실의 원인을 찾으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고, 욥 역시 그 원인을 찾고자 애썼다. 그의 답이 친구들과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의 틀 속에서 현실을 이해하려고 했고, 고통의 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현실에 답은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이성엔 한계가 있고, 그 이성으로 현실을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욥은 하나님을 만난 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고자 애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묻는 질문에 답하려 한다. 그는 다시 일어나고 다시 산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축복을 더하여 그전보다 더 큰 부와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질문에 답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묻는 질문 속에서, 우린 어떻게 답해야 할까? 주님께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라는 말씀 앞에 우린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를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욥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로부터 우리의 답은 시작되어야 한다. 비록, 다 알 수 없으나, 다 이해할 수 없으나, 우린 주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세상 가운데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 답이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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