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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사들 - 그곳에 히포크라테스는 없었다
미셸 시메스 지음, 최고나 옮김 / 책담 / 2015년 9월
평점 :
"만약 도시에 페스트가 퍼졌는데, 다섯 사람을 죽여서 5,000명을 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에는 게으른 자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진실'이 있다.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그 '진실'은 역사의 저편에서 잊혀지고, 일어나지 않은 일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로 사라져갈 것이다. 그렇게 잊혀진 진실은 반드시 같은 아픔으로 반복되기 마련이다. 지난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고 게을러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저자 미셸 시메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중 한 명으로 라디오와 TV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여러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그에게는 오랜 아픔이 있다. 나치가 집권하던 시절, 두 할아버지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것이다. 저자는 이런 개인적 아픔 이면에, 의사로써의 책임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의사들의 참혹한 만행 앞에 침묵할 수 없었다. 이 책은 생명을 구해야 할 의사들이 어떻게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었는지, 그들이 행한 실험이 정말로 과학의 발전에 보탬이 되었는지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과 고뇌의 흔적이다.
그는 두 할아버지에 대한 옅은 기억을 가지고 파시즘에 복무한 의사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아우슈비츠, 스트라스부르, 부헨발트 등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의료행위들이 자행되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의사들은 그들 스스로 인류에 봉사하고 있다는 신념을 버린 자들이 아니었다.
재판에서 확인된 의사들의 행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하고 끔찍하다. 저체온증 연구를 위해 수감자들을 얼음물 수용소에서 죽어가게 하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장기를 적출하는가 하면, 여성 수감자들을 불임시키기 위해 자궁에 포르말린을 주사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비인간적 행위를 가능하게 했을까? 의술을 통해 인류에 봉사하고자 했던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저자의 추적에 따르면 그들의 최후는 평온했다.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석방된 후 평범한 의사의 삶을 살았고, 심지어는 무죄를 선고 받고 명예를 누린 사람도 있었다. 이러하 ㄴ현실에서 다시 처음의 물음은 던지게 된다.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윤리를 져버리면서 의료 행위를 했던 이들에게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이토록 관대할 수 있는가?
저자는 결론에서 여러 수용소에서 자행된 실험들을 통해 의학의 진전에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반면, 고통과 죽음, 비명과 울부짖음은 생생하게 남았다고 말한다. 70여 년 전의 참혹한 역사를 뒤로 하고, 오늘의 삶을 돌아본다. 일본군 위안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진실은 외면당하고 있다. 당시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죄의 무게를 탕감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진실을 찾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무덤 위에 우리의 미래를 쌓아가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가 결코 가볍지 않다. 악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