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 - 왜 빌린 자의 의무만 있고 빌려준 자의 책임은 없는가
제윤경 지음 / 책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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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다. 쌀 한 되를 빌리더라도 마땅히 갚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빌렸다면, 더욱이 적은 금액이 아니라면 이걸 안 갚았다가는 큰일을 벌어질 게다. 그런데 책에서 저자는 "빚을 갚지 않을 수 있다"라는 상식 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대한 근거를 조목조목 이야기하는데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빚, 왜 나만의 문제가 아닌가

책에는 저자가 강의를 다니며 접한 사례들이 많이 담겨있다. "돈이 돈을 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수강생들은 당연하다고 반응했고 그것이 명백한 사실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을 물어보면 열심히 일을 하지만 돈은 항상 없다고  말한다. 부가 개인의 노력 여부가 아니라 부모를 잘 만나는 운과 횡재 등에 따라 사회 속에서 서열이 결정된다는 부정의를 쉽게 확인하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일도 우리에게 일상화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 그럴수록 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하며 불평등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수의 편에 선다는 데 있다. 성공하는 소수의 사람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의 능력을 잘 보살피고 다듬고 뒷받침해주고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아왔다"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이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점점 버거워지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가속화되는 속에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나무만 보던 눈을 들어 사회구조라는 숲을 보지 않으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빚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개인의 수준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어야 마땅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협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재적 연체자로서 고통 속에 빚을 갚고 있는 상황에서 빚을 갚지 못하는 몇몇 사람을 구제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지직에 일면 납득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어렵게 밎을 갚고 있으니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도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명령은 나 역시도 언제 어떻게 저 대열에 낄지 모른다는 내적 불안만을 키울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부업과 신용카드 그리고 금융제도

가계부채가 1,200조 원까지 치솟은 데에는 정부의 빚 권하기 정책과 금융사의 마케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빚도 자산이다"란 말은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학습되었다. 짧고도 강력한 메시지로 우리를 유혹하는 텔레비전 속 대출 광고는 일상이 될 정도로 익숙해졌다. 대부업체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은 금융감독원이 아닌 지방정부에 있어, 부족한 행정 인력으로 인해 대부업체들에 대한 관리감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다. 정부는 불법 사채 시장을 양성화하겠다 했지만 고금리 사금융은 여전히 간단한 등록 절차를 통해 쉽게 제도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대부업체에만 특혜 금리를 준다는 금융권의 따가운 시선이 불편한 정부는 금융권 전반에 특혜 고금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서민들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카드사에서 돈을 빌리고, 카드 값을 갚기 위해 대부업체를 이용하고, 대부업체 빚을 갚기 위해 고금리 사금융까지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한번 시작된 빚은 가난한 이들에게 빚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들을 노예 같은 삶으로 밀어 넣었다. 이들에게 추심의 손이 뻗친다. 우리나라 추심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추심원의 자격 요건에 제한이 없고 추심 방법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체는 채무자의 일상에 장애를 초래할 정도의 빚 독촉과 마주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사건으로 각인되고, 다른 빚을 추가로 얻어서 연체를 일시적이나마 회피하는 길로 가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생의 벼랑끝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데에는 정부의 역할도 적지 않은 것이다. 도덕적 해이는 채무자에게 발생하는 게 아니라, 세금으로 생계비를 지원받는 사람에게조차 빚을 권하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빚 못 갚을 권리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중세 시대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 받는 행위를 천시하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금용이 사람의 모든 노력과 결실을 제로로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실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한다. 그렇게 저자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채무자 구제 운동을 시작했고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그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죽거나 좌절하거나 지옥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 금융권의 수익성 때문에 사람들의 인격이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평범한 생각인 거다.


이 책은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에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생생하고 절박하게 다가오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서는 장면을 목격할 때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돈에 매인 삶, 기본적으로 누려야할 삶이 일상 곳곳에서 위협 받고 있는 우리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평범한 상식에 가까운 주장과 호소가 많은 이들에게 닿아 정말 일상에서 상식으로 확인되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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