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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 좋은 여성들 - 용기와 극복에 관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 지음, 최인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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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회로, 즉 관점을 바꾸기 위하여]

P.53
소저너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고 유약해서 투표를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던 남성 연사들에게 응수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여성은 홀로 세상을 뒤집을 만큼 강했습니다. 이 여성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함께 세상을 되돌려 다시 바로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소저너는 깊고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지금 여성들이 그렇기 하자고 하고 있으니 남성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 거예요.”

사회 질서는 관습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다. 관습은 옳고 그름의 잣대라기보다는 사회의 고정된 생각이다. 즉 가진 자의, 권력자의, 사회를 지배해 온 집단의 사고대로 관습이 잡혀 있고 우리는 그런 통념을 배웠다.

종교든 도덕이든 결국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며 이제야 과거의 색을 빼기 시작했기에, 우리의 잣대 중 통념이 지배하는 부분이 꽤나 있다. 고착화된 질서 중 여성을 알게 모르게 죄인으로 그리고 가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되는 게 당연한 인물로 그려낸 부분이 많다. 유구한 전통이든 정통적인 말씀이든 그걸 씻어내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점을 깨끗하게 씻겨준다. 위에 적은 인용처럼 말이다. 기독교 창세기의 내용을 그동안 여성이 큰 죄를 지어온 것으로 곧이곧대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왔다. 세상은 오랫동안 여성을 하대했기에 이를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고 틀렸다는 생각도 못 했으며 오히려 수긍했다.

그런데 소저너는 시선을 완전히 달리하였다. 여성을 죄인으로, 여성으로 인해 원죄가 태어난 것으로, 여성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성경을 해석할 때 소저너는 완전히 다르게 말하였다.

여성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 완전히 세상의 시선을 뒤집은 말을 했다. 그 한마디로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이 품고 있던 여성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게 해주었고, 종교에 품었던 나의 회의감을 씻겨주었을 뿐 아니라, ‘관점을 바꾼다는 건 이런 거야!’라는 명쾌한 선례를 보여주었다.

통념을 뒤집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다수다 옳다 여기는 부분에 의문을 가진다는 자체가 어려우며, 의문에 맞서고,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는 건 더욱 힘들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될 수는 없다]
You can’t be what you can’t see

물론 이 말은 절대법칙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을 읽거나 유명한 사람을 수업 시간에 배우며, 존경하는 사람을 정하고 그 사람을 쓰고 말해왔다. 이건 누군가를 인생의 목표로 설정해 그 사람이 살아간 그대로 똑같이 살아가라는 교육이 아니다.

배울 점을 찾기 위한 교육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기 하기 위한 교육이다. 예를 들어, 왕가리 마타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평생을 여성과 환경운동으로 일한다는 것 말이다. 왕가리 마타이를 배운다는 건 여성을 억압하고 환경을 신경 쓰지 않는 나라에서도 여성을 도울 수 있고 환경을 위해 힘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롤모델을 찾는다는 건 비현실적이라 생각한 일이 실존 인물을 통해 실현된 적이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며, 그렇기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어린 꿈나무들에게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희망을 이어주고, 현실과 고난의 길을 걷느라 희망과 꿈을 잃어가는 청춘들에게는 놓으려는 꿈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롤모델로 정한 사람이 한 쪽으로만 치우친다면? 한 성별로만, 한 직업으로만, 한 지역으로만, 한 계층으로만, 한 대학으로만. 그렇다면 그건 희망이 아니다. 하나의 길만 보여주는 건 그 길에 들어서지 않은 사람은 자격이 없고 틀렸다는 의미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다른 경로를 막는 일이자, 그 길을 택하지 않은 다수를 배제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여성을 보여준다. 여성을 무시해 온 오랜 과거는 역사적 사실에서 여성을 지웠다. 여성을 아무개로 치부하거나, 가부장적 관점에서 국가와 남성을 위해 희생해야지만 자랑했으며, 그게 아니라면 아예 등장하지 못한 채 이름이 흩어졌다.

책이 여성을 다시 모았다. 흩어진 이름을, 역사가 올바르게 호명하지 못한 이름을 다시 부르면서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두려움이 없는 행동 하나하나를 기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은 할 수 없다는, 여성은 하기 어렵다는 등의 오랫동안 틀린 편견을 산산이 부수고 있다.

P.11
절대로 이 책이 마침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의 호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길 응원해주고 싶다.

P.55
개인이 자유로울 때 우리는 더 자유롭다. 모두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 전체가 더 많은 기회를 가진다. 그것이 소저너 투르스의 사명이었고, 도로시 하이트의 사명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사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P.68
“나는 다른 여성들을 위해 제의받은 자리를 수락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야 후에 올 다른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권리가 생길 테니까요.” -프랜시스 퍼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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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 문지아이들 170
이경혜 지음, 이은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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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의미>
책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끔 한다는 점에서 특히 좋았다. ‘그래서 꽁치는 탈출했어?’ 혹은 ‘나쁜 인간이야!’ 라는 감상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행위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꽁치는 ‘장화 신은 고양이’에 빠지고, 쥐 할아버지는 평생을 ‘쥐둔갑 타령’ 내용을 궁금해했다. 마침내 꽁치가 읽어주자 책 결말이 어떠하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긴다. 고양이든 쥐든, 그리고 인간이든 자신을 궁금해한다. 자신과 관련된 듯한 이야기라면 호기심을 가진다. 즉, 글을 읽으며 우리는 스스로를 궁금해하고 상상할 수 있고, 나와 관련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나며 자신을 고민해 보기도 한다는 점을 이 책은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

특히, 쥐 할아버지는 쥐 둔갑 타령에서 쥐의 비극적 결말을 만나지만, 책 읽는 고양이가 읽어준 시에서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즉 글을 읽는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우리에게 여러 감정과 상황에 빠져들어 내 존재를 고민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고양이를 대하는 인간에 일침하는 동화적 비판 >
고양이와 인간. 동물과 인간. 이 관계는 사랑이 넘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방법이 틀리기도 하고, 사랑은커녕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가장 속 시원했던 점은 ‘밥’에 관한 부분이다. 한국 사람에게 밥은 무척 중요해서 그런지 인간이든 개나 고양이든 밥을 챙겨주고 밥을 먹었는지 늘상 물어본다. 중요한 건 동물을 대할 때 밥을 주면 다 좋아하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맛있는 밥 주는 건 동물 인간 너나할 것 없이 좋아한다.

하지만 동물은 밥‘만’ 주면 ‘다’ 좋아하고 해결되는 줄 안다. 조건 없이 주는 밥이 필요하고, 밥 이외에도 따뜻한 잠자리, 따뜻한 목소리, 애정담긴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한데 말이다.

꽁치의 예전 집주인 가족들은 꽁치가 좋아하는 밥인 생선 꽁치를 이용한다. 쥐를 잡아와야 꽁치 하나 툭 던져주는 아줌마, SNS에 유명해진 후로 꽁치 많이 줄 테니 도망가지 말라는 가족들. 촬영은 푼돈이고 광고가 목돈이라는 영미, 재산 잡으면 나눠달라 하는 이웃, 거기에 동네잔치를 열겠다는 아줌마. 이 모든 걸 단지 생선 꽁치를 주는 것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난 그 아주머니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나비’나 ‘야옹이’라고 아무렇게나 부르지도 않고, 쓰다듬거나 바짝 붙어 서서 지켜보지도 않았거든.”

이건 신선한 지적이었다. 이름을 불러주고 지어주는 건 애정이 담긴 인간의 행동이라 생각했다. 물론 내가 묻는다고 고양이가 답해줄 순 없겠다만, 고양이가 자기의 이름이 떡 하니 있는데도 인간이 마음대로 부른다면 퍽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한 마리 한 마리에게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고양이라는 종류에 뭉뚱그려 인간이 고양이를 떠올릴 때 상징되는 것들로 부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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