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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평점 :
* 인물 ‘강치우’
차갑고 냉정한 인물이다. 늘 여유롭고 당황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는 걸 성공시킨다. 한마디로 정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단면적인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냉소한 게 전부는 아닌 인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만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어딘가 숨어있다가 삐져나오는 따뜻함이 종종 발견된다. 일이 들어오지 않는 이기동에게는 무슨 이유로 그런지 넉넉한 돈을 주고 일을 맡기곤 하는 모먼트까지.
오직 자신만을 믿는, 독단적이며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책점’을 자주 보는 귀여운 구석도 있다. 그렇다고 책점을 보고 벌벌 떠는 성격은 아니지만, 책점이 안 좋을 땐 어딘가 찝찝해한다.
이렇게 냉소적이면서도 따뜻함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 강치우의 모습은 어쩌면 딜리터와 작가라는 두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라 가능하다고 추측된다.
딜리터와는 다르게 작가로서 그는 잘 듣는 사람이다. 그냥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니라 상대가 별뜻 없이 쏟아내는 말 속에서 쓸 만한 내용을 고르는 일을 한다. 타인의 삶을 이야기로 가공해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두 가지의 직업 사이에서 형성된 강치우라는 인물의 성격이 이해가 된다.
P.44 ) “비겁한 작가가 그나마 열심히 할 수 있는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더라도 작가라면 편견을 가지면 안됩니다.”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를 이해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독자가 작가 강치우에게 날 선 질문을 했을 때 강치우가 한 대답이다. 세상 사람을 이해하는 것,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언정 작가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이런 태도가 강치우의 경청 능력과 따뜻함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 ‘현실’은 어디에, 그리고 무엇인가
여느 판타지가 그러하듯 이 책의 이야기도 꼭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인물이 살고 있을 것 같고, 내가 옆 사람이 엄청나거나 엄청나진 않아도 소소하게 놀랄 정도의 능력을 숨기고 있을 듯 하다.
책에서는 어릴 적부터 물건을 만지면 깨는 사람이 딜리터가 된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들 마이더스의 손 반대로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딜리터의 자질을 가진 설정이라니. 더욱 현실에 있을 법하게 묘사했다.
또한, 강치우를 주인공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마치 작가 강치우가 쓴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특히, 책 마지막 장이 이런 기분을 더욱 유도한다. 출판사가 말렸지만 열린 결말을 위해 마지막 문장에 ‘.’을 찍지 않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책 마지막 문장에는 ‘.’이 없다. 이건 아마 실감있게 하려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그리고 레이어를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장면이 있다. 현재 있는 곳이 현실이라면 소하윤이 잘 살고있는 다른 차원은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현실에서 환상을 읽고 있는 와중, 판타지 소설에서 현실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설정이 오묘하게 다가왔다.
* 딜리팅의 의미
“딜리팅의 진짜 의미는 물건을 사라지게 하는 가 아니라 사람을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거라고 적혀 있었어요.”
책은 ‘다른 차원’을 포토샵의 레이어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포토샵을 이용해보면 특정 레이어를 클릭 한번으로 투명하게 만들어, 지워진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우리는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
책은 ‘사라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딜리팅이라는 사라짐의 의미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딜리팅이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행위라는 걸 모른 채 딜리팅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내 눈 앞에 없다는 의미이며,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타인을 위한 게 아닌 자신을 위해 이용하게 된다. 나의 잘못을 감추는 용도로, 나에게 위험이 되는 존재를 없애는 용도로 말이다. 책에서는 흔적을 없애주는 사람, 조직폭력배나 살인청부업자들의 뒷정리를 해주는 사람인 더스트맨이 그러하다.
하지만 딜리팅의 본 의미를 아는 강치우는 다르다. 자신이 아닌 여자친구를 위해 딜리팅을 실행한다. 지금 존재하는 공간에서 힘들어 하는 하윤을 위해, 죽어서 사라지려는 하윤에게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자고 한다.
죽음을 아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죽음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건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인식된다. 그래서 강치우는 죽음으로 사라진다는 건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완전히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죽음보다 딜리팅으로 사라지는 법이 낫다고 생각하여 딜리팅을 실행한 게 아닐까.
책을 읽으며 사라짐과 죽음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죽음은 완전한 사라짐일까, 죽음을 경험한 자가 없는 세상에 죽음을 완전한 사라짐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이 만약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라면 딜리팅은 살인과 동의어가 아닐까.
죽음이 다른 차원으로 가는 딜리팅의 의미와 같다면 딜리터는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닐까. 의도가 어떻든 강치우처럼 하윤을 위한 선택이었든 함훈처럼 악한 의도에 의한 선택이었든 둘 다 살인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밀히 따지면 둘 다가 아니라 강치우는 살인을 두 번한 것이고, 함훈은 살인 의뢰자인 게 아닐까. 아니면 하윤은 자살이고, 함동수는 타살인가.
<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는 페이지터너다. 금방 읽히는 만큼 직관적인 책이다. 자칫 단순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책 깊은 곳에는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장치가 있다.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은 드라마같다. 친근하게 다가와 생각을 많게 하는 드라마. 고전에 비해 가벼움은 있고 깊이나 상세한 묘사가 덜한 건 맞지만, 몇몇 고루한 고전이 못하는 걸 이 책은 한다.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머릿속에서 토론하게 만들었다. 이 책이 드라마였다면 클립 영상으로 돌아다니며 그 댓글에는 분명 죽음과 옮겨짐 그리고 사라짐의 의미에 대해 상당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