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뭐 어때서
김상준 지음 / 코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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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할머니가 와병중에 계신지 7년째. 상당한 금액의 치료비도 부담스럽고, 온 가족이 간병하기에도 점점 지쳐가고,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족 분위기에도 숨이 막힐 듯 할 때.... 차라리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할머니도, 우리 가족도 모두 고통을 덜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순간, 혹은 어릴 적부터 절친했던 친구가 있는데, 학창시절부터 늘 나보다 공부도, 운동도 잘 하고, 재주도 많아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어려움 없이 들어가 나보다 많은 연봉에, 나보다 빠른 승진을 거듭하고, 나보다 먼저 집을 산데다 자식들마저 잘났을 때....

정말 친한 친구임에도 참을 수없는 질투가 솟아오르고, 그 친구도 뭔가 좀 안 되는 일이 생겼음 하는 불순한 생각이 드는 순간, 혹은 아내로써, 며느리로써, 엄마로써, 직장인으로써, T.V 드라마의 잘난 여주인공처럼 모든 주변인들에게 칭찬 받는 훌륭한 여성이 되고 싶지만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고, 나만 희생하는 게 너무 짜증나서 때로는 맡은 역할을 소홀히 하고 철저히 이기적인 나쁜(?) 여자가 되고 싶은 순간, 또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건만 자꾸만 내가 사귀는 사람보다 다른 이성에게 마음이 끌려 당황스러운 순간, 혹은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세상이 나한테만 가혹하게 돌아가는 것 같고, 나만 피해를 보는 것 같아 그 세상의 불공평함에 치를 떨다가 분노로 폭발하는 순간.... 이외에도 수많은 불순한, 혹은 불건전한, 혹은 나쁜 생각이 내 맘을 가득 메울 때...

우리는 수년간 학교에서 배워왔던 도덕, 윤리, 그리고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대물림한 인습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절로 떠올리면서 자신에게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내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고민을 하기도 한다. 나도 책에 언급된 많은 부분들을 실제로 겪으면서, 그때마다 생각으로나마 죄를 저지른 것에 큰 가책을 느껴 혼자 일기장에 시답잖은 속죄의 글을 올려놓고 나는 참 못났구나라는 생각에 힘겨워하곤 했었다.

이 책은 한 정신과 전문의가 그런 나쁜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로워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불완전한 '나'에게, '내가 뭐 어때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세상에 어딨어? 그런 생각이 든다해도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어.'라는 걸 차근히 설명하고 있다. 그냥 일반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매 편의 주제마다 한 두 편씩의 영화에서 따온 상황이나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예를 들어 풀어나가고 있다. 근래 많은 전문가들이 대중에게 바짝 다가서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그들만의 영역의 장벽 파괴'를 위해 이론이라는 거품은 빼고, 누구나 읽기 쉽고 금방 이해할 것 같은 쉬운 얘기들을 일상 용어로 전달하다보면, 결국 남는 건 하나도 없는 자칫 진부한 말잔치로 끝날 수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영화라는 장치가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의 무게를 강하게 실어주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미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이란 전작으로 심리학과 영화의 결합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책속에 열거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굉장한 영화광임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리분석의 소재로써 영화나 소설만큼 매력적인 대상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와 소설은 질곡 많고 지뢰밭 같은 우리네 삶, 그리고 수많은 인간군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지루한, 혹은 죽어버린 설명보다는 우리가 이미 봤거나 관심을 갖고 있거나, 원한다면 다시 볼 수도 있는, 조금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를 통해 도덕적 잣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저자가 장벽을 허물기 위해 희생한 대가를 아까워하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한 채, 저자의 대중지향적 취향이 너무 가벼운건 아닌가 하는 회의적 시선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굉장한 위로를 얻는 이들도 많으리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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