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사람과 사는 지혜 - 루이제 린저의 38가지 이야기
루이제 린저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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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때 내가 무척 좋아하던 작가가 루이제 린저였다. 딱 꼬집어 이러이러 하기에 그를 좋아했다...라고 할만한 이유가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 당시에는 그의 작품만을 골라 읽으면서 친구한테 뭐라고 열심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대면서 작가예찬론을 펼쳤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나의 학창 시절과 함께 묻혀진 작가가 되어버렸다.스무살이 넘어서는 그의 글을 단 한줄도 본적이 없으니... 그러다 우연히 얼마전 루이제 린저가 쓴 소설이 아닌 이 산문집을 발견하고 빌려봤는데.... 글쎄, 책소개를 보고 막연하게 이 책이 루이제 린저의 삶의 다양한 모습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냈을 거라고 짐작해서인지 책을 읽어가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엄밀하게 말해 이 책은 삶의 면면을 그려낸 수필이아니라 신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인생상담 컬럼과 유사한 형식으로, 잡지에 실었던 인생의 제반 문제에 관한 독자와의 대화를 정리해 책으로 펴낸 것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정서로 다가갈 수 있는 인생의 제반 문제이기에 제목은 정말 간단하다. 사랑, 신뢰, 친구, 용기, 인내, 태연함, 독선, 죽음, 우울, 감사, 행복... 등등등 그외에도 수많은, 누구나 삶의 문제를 거론할 때 항상 등장하는 약간은 구태의연한 제목들을 가지고 저자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러운 조언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 내용까지 구태의연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치 정권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신념으로 가득차 전혀 굽힘이 없었던 저자의 성정답게 그녀의 조언이 매우 딱딱하게 느껴진다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나 할까...

삶에 대한 조언을 전달하는 방식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터인데, 자신의 일상생활의 작은 경험담을 들려주며 서서히 어려운 인생 문제에 접근하여 정답은 아닐지라도 바람직한 해제가 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충고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수필들이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의 스폰지 케잌이라면, 루이제 린저의 이 책은 유난히 딱딱한 바게뜨빵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바게뜨의 팍팍하고 건조함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조언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들은 저자의 이런 건조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해법을 권고 받는 것을 더욱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의 나는 아마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나는 남과 같지 않아...라는 어리석은 우월감으로 린저의 이러한 건조함을 이해하는 척 하며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떠벌리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은 학교를 다닐 때와 달리 현실의 삶이 그토록 팍팍하게 느껴지기 때문인지...린저의 건조함과 냉정함을 쉽게 소화해내기가 조금은 힘겹다. 루이제 린저가 이 책에서 아무리 다함께 사는 세상의 지혜를 소상히 알려준다 해도, 그건 내겐 그녀의 말처럼 진정으로 도달하기 힘든, 성숙하고, 현명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뜬구름같은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 모처럼 만난 린저의 글이 행복한 경험으로 끝나질 못 해 조금은 안타까운 맘으로 책장을 덮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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