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짓는 생활 - 농사를 짓고 글도 짓습니다
남설희 지음 / 아무책방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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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그림자는 빛이 낳은 사생아다. 그늘에 앉아 맞은편 고목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싹이 트지 않은 저 고목도 색을 지니는데 고목의 그림자는 오직 시린 어둠뿐이다. 빛의 손길이 닿은 모든 사물은 저마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자신만의 색을 지닌다. 그림자만 자신의 색이 없다. 까맣지도 하얗지도 않다. 불투명한 어둠은 중심이 없고 시간에 따라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 모습이 나와 닮았다. 나는 빛나는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P72 버섯은 신기하다. 썩어버린 나무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다. 부패되고 썩은 것을 양분 삼아 자신을 피운다. 기특하다. 그동안 나 자신은 부패하고 썩어서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버섯은 자란다. 곰팡이가 되지 않고 썩은 것을 삭히고 품어 자란다. 어쩌면 나는 삭히는 시간이 부족했는지 모른다.

P77 마음이 무겁다. 욕심의 무게다. 어쩌면 지옥은 죽어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 느끼는 죄책감이 아닐까.

P110 밭에 주저앉으니 무성한 풀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가뭄은 작물을 마르게 하지만 반대로 풀은 무성하게 만든다. 신기하다. 같은 식물인데도 일부러 키운 작물은 가물고 저절로 자란 풀은 무성하다.
책이 작고 예쁘다. 단단하게 그리고 초록초록하게. 참 예쁘게 잘 만들어졌다.

그런데 내용은 예쁘지만은 않다. 고된 농사일, 자기 혐오 등이 신랄하게 담겨있다.

그런데 자기에 대한 날이 선 독설과 잔뜩 찌그러진 채 부글부글거리는 글이 신기하게 술술 읽혔다.

작가는 글을 쓴답시고 농사 짓는 시골 부모님 댁에 처박혀(?) 지루하고 고된 농사일을 돕는 백수처럼 살고 있는 본인에 대한 자조적인 이야기를 너무나 솔직하게, 게다가 본인의 주변 환경과 인물들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재미있게 써냈다.

사실 시골에서는 별거 아니겠지만 풀 한번 뽑아보기 힘든 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자잘한 농사일기 마저도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고, 작물에 대한 지식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럽고 작가가 앞으로 더 글로 펼쳐보일 수 있는 유니크한 스펙트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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