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전후 민주주의 사상
나카노 도시오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삼인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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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정신없이 읽었다. 재미있다고 하면 어폐가 있을 테고, 뭐랄까, 논의 치밀함과 광범위함에 감탄했다고 해야 옳겠다. 매우 유익한 책이란 생각이다. 삼인출판사의 안목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물들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저자 나카노 도시오는 이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전후 일본인이 가져야 할 사상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베버의 사회학 이론을 수용해 일본 사회학의 비조로 불리는 오쓰카 히사오, 그리고 '텐노'(천황)로 불리며 전후 일본 사상계를 휘어잡은 거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도마에 올려놓고 아주 정밀하고 날렵하게 칼질을 한다. 물론 이 두 거장의 사상이 주로 분석대상이긴 하지만,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다른 사상가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심지어 요즘 우리나라에서 내셔널리즘비판, 페미니즘이론, 젠더비평 등으로 자주 번역소개되곤 하는 우에노 치즈코조차 그 생각의 허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을 비판하는 저자 도시오의 칼날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전시기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이 깔끔한 단절을 이룬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판하는 제2장은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일본사상가들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한다. 몇몇은 알되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다. 국민국가담론에 익숙한 요즘의 젊은 인문학도들은 알 만한 사람도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사람을 꼽으면, 마루야마 마사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 정도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전후 일본의 책임론을 진지하게 파고든 비평가이자 시인으로, 우리에겐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마루야마텐노'로 불리는 일본사상계의 거인이라는 것, 그래서 그의 저작을 접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광휘에 휘둘려, 그를 읽어봐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진 적이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통나무에서 출간된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글머리에 있는 김용옥 선생의 글을 읽으면,  '텐노'니 '거대한 거짓말'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일본에서 그는 그만큼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 책속에서 김용옥은 마루야마라는 대학자에 대한 존경과 경탄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처음엔 짜증이 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씌어진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고 그가 바라보는 마루야마와 마루야마 사상의 문제점을 접하게 되면, 역시 김용옥이 명민한 인물이란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그의 형식은 잡스러운 반면, 그가 말하고자는 내용은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는데, 암튼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에서 김용옥 선생이 마사오를 학자로서 그 치밀하고 수준 높은 '필로로기'(문헌학)의 경지에 감탄하는 것이지 그의 필로소피에 감탄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듯이, '텐노'로 불리는 마루야마의 사상에는 일정한 결함이 내재되어 있음은 일본사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모양이다. 이 책은 그것을 선명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책이다. 정치학 연구자나 일본사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문헌으로 각광받는 마루야마 사상의 맹점을 이렇게 잘 풀어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개진하는 매개로 삼았던  에도시대의 '오규 소라이'과 메이지유신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해석을 잘 쫒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분들에겐 여러 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깃거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반드시 그걸 알아야 책의 주제를 파악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원제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 붉은 글자로 새겨진 "동원, 주체, 전쟁책임"이라는 것을 다루기 위해서 저자는 일본의 전후를 새로운 원점으로 규정하면서 국민통합을 주장했던 사상가들의 과오를 묻고 있는 것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15년간 이어진 일본의 총력전 체제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전후의 일본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본의 주류 사상가들의 내면에 어떤 모순적인 논리가 잠복해 있었으며, 그것에 노출된 일본이 어떻게 하여 아무 반성없이, 오늘날과 같은,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길을 걷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 도시오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것처럼 그의 전후 사상이 그의 전시기의 사상과 그리 깔끔하게 단절되지 않았다고 본다. 전시기의 총동원체제에 봉사하던 논리가 여전히 전후에서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진단에는 일본의 양심적(아니 엄격한) 지식인의 혜안이 느껴진다.

"전전과 전후의 진정한 단절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을 그저 선언으로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히사오와 마사오의 생각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선명히 끄집어 보임으로써 규명한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그 논의의 과정(논리전개)을 일일히 나열할 능력이 내겐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책임의 담론은 이런 이론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통과해야만 더 굳건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허상을 깨부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후 어떤 지식인도 "일본을 '깨는' 비판"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파괴 없이 구축된 건물 위에 옥탑방처럼 지어진 자원봉사, 비정부기구의 활동 역시 전전의 총동원체제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자문하고 있다.

나카노 도시오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올바른 전쟁책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면서, 자기가 분열되는, 다시 말해 주체가 분열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후 세대의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종군위안부'였던 피해자들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일로서의 전시 성폭력만은 아니다. 그녀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폭력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책임의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전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전시'를 이어받고 있는 이 '전후'에 대해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본문 277쪽)

"그런데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책임을 묻는 구체적인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동일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분열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나'가 불가피하게 자기 분열적인 갈등을 겪고 그것을 헤쳐가는 과정이다. 그 출발점은 '타자의 소리를 듣는 수동적인 체험'이다. 피해자의 소리가 나에게 들리는 방법으로 혹은 '듣게 되는' 방법으로, 그렇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91년 '종군위안부'였음을 밝히고 고발하기 시작한 김학순 할머니 등의 행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타자의 출현은 그것 없이는 직시할 수 없었던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려주고, '나'에 대해 과거와의 관계를 묻고 죄책감 없이 만들어져온, 또는 '무구함'을 의심하지 않은 채 만들어져온 이 '나'의 동일성(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 (본문280-281쪽)

위의 인용은 일본 지식인의 전쟁책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내가 상처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내게 가져야 할 태도인 것 같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알겠다. 책임의 문제는 권모술수를 넘어선 곳에 자리한다.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뒤로 우리의 등에도 큰 혹이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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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테라스만찬 > 세대갈등... 풀리지 않는 깊은 골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 세대, 그 갈등과 조화의 미학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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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002년 대선을 통해 정권의 색깔(?)이 바뀐 충격적인 사건을 시발점으로, IMF하의 정치,경제 생활영역에서의 의식의 변화 및 쌍방향적 그리고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문화공간이라는 제 3의 공간에서의 의식의 변화 등을 논하며, 권위주의/평등주의/친미감정/북한호감도/사회불신/시민단체참여율/개방성 등 수많은 항목의 설문을 통해 우리 사회 전반을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일단, 보수우익친미 성향이 높은 5060세대에게 있어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1960-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국가 통제력이 강력히 요구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자신을 즉, 개인을 죽이고 국가를 절대시하며 그 권위에 복종함이 당연한 살길이었고, 전쟁후진국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을 향해 매진해야만 했다. 그래서 5060들에겐 [국가주의, 권위주의, 성장주의]가 의식 전반에 뿌리박혀 있고, 이 대의를 위해서는 개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평등, 공정성 등은 쉬 무시될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하지만 5060들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거름삼아 전쟁의 잿더미 위에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인 2030에게는 국가의 의미가 좀 다르다. 머슬로우의 욕구이론에 비춰봐도, 2030에겐 5060에게 짙게 드리워있는 전쟁의 위협이나 긂주림으로부터 살아남고자 했던 절박함을 넘어선 존중받는 개인의 가치에 대한 더 높은 욕구가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2030은 5060의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에 정면대립하게 되는 것이고, 무조건적인 성장주의와 이를 지키기 위해 구축된 학연.지연의 엘리트주의에 반기를 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가치’가 중요한 2030은 국가권력을 향해 소수라면 소수의 투쟁을 벌여오다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상품’을 끌어다가 예기치 못한 드라마틱한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개인의 영역을 더 중시해서 국가에 맞서기보다 개인의 영역에 들어앉아 있기를 즐기던 보이지 않는 2030의 흩어진 힘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절대촉매제로 인터넷이라는, 2030이 우위인 매체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승리는 단지 2030만의 투쟁결과물이 아닌 1996년 이후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의한 사회일원 공동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날에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고 경제 성장을 위해 그토록 충성하며 따랐던 국가로부터 IMF를 겪으며 철저하게 배신당한 5060의 허탈감은 그들의 치솟았던 [국가주의, 권위주의, 성장주의]에 회의를 갖게 했으며, 이전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개방적인 의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깨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5060의 움직임은 2030의 의식수준에 비해 많이 저조하나 같은 방향을 향해 변화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저자는 2030과 5060 세대간의 충돌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의 내용에 상충하는 충돌이 아닌 그 속도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IMF라는 침의 효력이 5060 의식 전반에 미칠 수 있는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즉 전쟁가능성이 있는 이념적 적대관계 하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국가이고 전쟁의 기억을 여전히 안고 있는 국가이다. 물론 프랑스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국민의식을 조사하는 경우, 개개인의 정치이념은 그 개인의 의식이나 가치관의 한 요소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과 빨갱이(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_-;;)를 겪었던 5060들에겐 이념은 아직도 현실이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김정일에게 쌀 퍼다주고 수백 마리의 소를 갖다 주다가 북한이 힘내서 다시 밀고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근원적인 두려움으로 갖게 된 친미감정과 그렇지 않은 2030의 북한호감도의 상극관계가, 과연 의식조사의 한 필터로만 유용할가 하는 못미더움이 있다. 솔직히 저자처럼 ‘세대 충돌은 없다’고 목소리 높여 단정하기엔 삐걱거림의 근원적인 골이 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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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率路 > 혹시나가 역시나.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SERI 연구에세이 47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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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국의 소위 '평등주의'담론을 일종의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생각해왔고, 더군다나 이 책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왔기에 무슨소리를 할런지는 안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에 언제나 그냥 지나쳐왔다. 그럼에도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저자의 명성 때문인데,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저술을 접해본적이 없기에 짧은 책으로나마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실망이었다.

우리가 소위 '한국의 평등주의'를 이야기하려면 두가지의 전제 즉, i)과연 한국의 경우 유달리 평등성향이 강한것이 사실인지 ii)평등주의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책은 이 두가지에 대해 전혀 설명해내지 못했다.

우선 한국의 경우 유달리 평등성향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에 대해 저자는 그저 '다들 그렇단다'는 언급만하고 넘어간다. 수필이 아닌 이상 비교를 하거나 분석을 하는 등 나름의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사회과학 서적의 기본 요건이 아닐까란 점에서 책은 굉장히 실망스럽다. '사돈이 땅사면 배아픈 감정'은 인간의 경우라면 누구나 느낄법한 감정이며 이는 외국의 영화나 소설을 봐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정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이 한국인의 경우 실제 강하기나 한건지 아니면 표현만 과장된 것인지, 그리고 (만약 강하다면) 그러한 개인적 감정이 사회현상으로 확장되어 표출되는 데에는 어떤 기제가 숨어있는지 정도는 언급을 해주는 것이 성실한 자세이겠건만, 그런 언급은 정말 '전혀'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로-이는 첫번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데-저자는 '평등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등주의에 대한 개념규정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덧 갑자기 다원성의 반대되는 '일원화'로서의 평등을 이야기하고 사적재산권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폭력성(?)을 보이다가 자기결정권과 다양성으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저자도 헷갈리고 독자도 헷갈린다. 지방분권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평등주의적이지만 어떤측면에서보면 서울로 일원화된 사회를 분산시켜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적이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사유재산권의 완전보장 측면에서보면 자유주의적이지만 다양한 것들을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일원화 시킨다는 측면에서 평등주의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란 노조는 죄다 귀족노조 운운하는건 평등주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작 자본가에 대해서는 귀족운운 안하는걸 보면 엄청난 귀족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것을 저자 또한 알긴 아는지 스스로도 계속 헷갈리며, 그에 따라 읽는 나도 계속 헷갈렸다. 따지고보면 저자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파시즘(혹은 국가주의)에 의한 사상통제 및 일원화, 돈이라는 그 단한가지 기준만으로 줄을 세우는 천민자본주의, 아버지 밑에 일렬로 줄서게 만드는 가부장주의(그리고 권위주의), 전공을 불문하고 점수하나에 맞춰 학력, 아니 심지어 인간의 됨됨이까지 판단하는 학력주의, 오로지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중잣대 뭐 이런 것을 오로지 '평등주의'라는 센세이셔널한 단어 단 하나로 담아내려니 그게 어디 담아내지겠는가? 뿐만아니라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사회현상을 끼워맞추려다보니 여러가지 만행아닌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를테면 독재자로부터 받은 억압이-그 정도의 심대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채-민중이나 상류층이나 똑같았다고 이야기를 하며(푸코가 이런 곳에 인용될줄이야~!!), 권리만 주장하지 의무는 외면하는 것은 상류층도 마찬가지(외려 사회적 여파는 그들이 더 강하다)임에도 중산층과 하층민만의 습속인것처럼 이야기할 뿐만아니라,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자유를 평등의 반대말로 사용하고 있다. 빈민들에게 자유가 있을까? 심각한 불평등으로 학업을 관두게 되는 슬럼가 자녀들이 자유로운가? 자유의 반대말은 구속이고 평등의 반대말은 불평등이지, 자유와 평등 그 자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루소는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주의'사상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빡센(?)평등사상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위와같은 헐거운(?) 논의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바로 원인과 결과의 혼동이다. 그래, 평등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의도 안되었고, 평등주의가 실제 만연한건지 실증적인 검토도 되지 않았다해도 일단 평등주의라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그게 한국인의 마음속의 '습관'으로 치부할 문제인건가? 평등주의가 우리사회 병폐의 어떤 주된 '원인'인걸까? 한국인들은 '원래' 평등주의적인걸까? 한 집단이 '원래'그렇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신중해야 한다. 유태인은 원래 사악해, 아랍인들은 원래 과격해, 전라도사람들은 원래 속을 알수없어, 이런 '원래'의 결과가 인류사에 어떤 비극을 야기했는지 안다면 말이다. 외려 한국의 평등주의-그런 것이 만약 있다면-는 원인이라기보단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경험은 친일파들만을 대거 상류층화시켰으며, 이러한 상류층은 실패한 과거사 정리로 오늘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화과정에서 상류층이 보여준 행태는 설령 저자 말마따나 그들도 똑같이 국가에 의해 탄압받았다 하더라도 실망스럽거나 외려 반동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힘쓴 민중들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이런 고리타분한 역사적 배경을 제쳐두더라도 국가경제가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망은 비슷한 경제발전 시기의 서구국가들과는 비교하는게 민망할 정도이며, 소득의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보수세력마저 인정할 지경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 측면에서 시민들은 일제시대부터 오랜기간 '사상통제', 그리고 그로인한 '자기검열'을 받아왔다.(아울러 그 가장 큰 원인이 된 악법은 지금도 안녕하시다) 자, 이런데도 '평등주의'가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

저자 또한 이 부분을 인지해서인지 계속적으로 갈팡질팡하다가 마지막에서야 이야기한다. '평등주의를 드러내기'위해 책을 썼다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평등주의는 저자가 드러내어주어 우리가 처음 알게된 새삼스러운 무언가가 아니다. 이미 독재권력과 재벌들은 당면한 문제해결을 회피할 목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따라 멋대로 끼워맞춘 평등주의 담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왔고, 이로인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합의'는 번번히 우회되고 지연되어왔다. 어쨌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후편을 쓸 계획이 있다는 것.(물론 거기에 '언제 착수할지 모른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_-;;;;) 후편에서는 과연 이 평등주의에 대한 나의 편견-결국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불과할 뿐이라는-을 깨주실 수 있으려나, 하여간 지금까지는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것만큼은 사실이다.

ps.그나마 이 책에서 건질만한 것은 우리의 모델, 우리의 합의, 우리사회에 맞는 교양과 도덕이 형성되지 않은 점을 개탄하며 사회적 합의를 촉구하는 저자의 지적 뿐이다. 그런데 그나마도 정작 저자 스스로 불분명한 근거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한 꼴이라 사회적 합의를 촉진하기보단 방해만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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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구성한 자본주의의 역사,『자본주의 역사강의 』

* 작년 가을에 대학원에서 학술강좌 형식으로 백승욱 선생의 강의가 기획되었는데 강의를 토대로 작성된 논문이 이번에 책으로 나온 것 같다. 백승욱은 최근 한국에서 세계-체계론적 관점을 통해 동아시아 세계질서를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소장학자인데 그의 분석이 과연 어떠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을런지 잘 모그렜다. 지레 짐작이지만 그가 동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것이 아닌가한다.

세계경제 중심지 동아시아로 이동

동아시아 정치·경제적 위기 근대자본주의 무너뜨릴 파괴력과
체제 갱신할 잠재력 동시 지녀 ‘세계체제분석’ 틀로 전망

 전세계의 눈길이 지금 동아시아로 쏠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이다. 최근 눈길이 향하는 중심에는 북한 핵실험 사태가 자리하고 있겠지만, 근본적인 바탕에는 ‘초강대국’ 미국과 잠재적 경쟁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사이의 역학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일본도 수상한 움직임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동아시아의 오늘은 어떻게 시작됐으며 내일은 어찌 될 것인가? 급변하는 정세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로선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미래’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동아시아 관련 국제정세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현재 대다수의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체제를 역사적으로 들여다 본 것이다. 단 1970년대에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의해 대두된 ‘세계체계 분석(world-system analysis)’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통해서다. 20세기 말 이후 진행중인 여러 변화를 이해하려면 시야를 시간적·공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선 기존의 분석틀을 버리고 처음부터 전지구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체계 분석의 눈에 띄는 시각은 자본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된다. 흔히 자본주의는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시작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분석틀은 자본주의의 기원이 그보다 훨씬 전인 16세기, 길게는 13~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이전에는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따라 교역·교환이 이뤄지던 ‘재분배’ 사회였다. 특정세력이 이윤을 크게 남길 수 없도록 종교 등을 통해 억눌러왔다. 막대한 이윤의 창출은 ‘독점’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장기 16세기(1450~1640년)에 이르러선 독점을 향한 욕구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당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사실상 국가독점기업인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원거리무역을 독점했고 부의 축적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본주의가 싹텄다고 보는 것이다.

» 뉴욕 월스트리트.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인 금융 중심의 축적구조를 안착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지금의 전지구적 경제위기는 미국 헤게모니의 호시절과 함께 시작됐고 자본주의의 미래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달렸다.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기존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세계가 이미 시작된 걸까? 그린비 출판사 제공
고삐 풀린 독점의 경향은 중상주의시대(1650~1730년)에 더욱 확대됐고, 장기 19세기(1730~1914년)에 이르러선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이 네덜란드의 패권을 이어받아 자본주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전에는 상업을 통해서만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지만, 기계의 출현으로 이젠 생산 영역에서도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인도 등 식민지를 통해 값싸게 원료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이윤은 극대화됐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고이윤을 얻을 수 있는 분야로 금융이 떠올랐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 헤게모니는 법인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으로 넘어갔다. 냉전체제·군사력 등이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강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세계시장 독점으로부터 태어나 유지·발전돼 왔다. 자본주의의 상징은 경제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융합’인 셈이다.

이제 미국은 지고 있다. 세계경제 주도권은 축소되고 군사력만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헤게모니는 또 어딘가로 넘어갈 것이다. 세계체계 분석의 대가들은 동아시아에 주목한다. 냉전의 최전선이었기에 미국의 갖은 원조를 받아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동아시아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탈냉전에 따른 정세 변화, 구사회주의권 중국의 편입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북핵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위기가 불어닥치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위기는 근대자본주의 체계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파괴력을 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축적체제와 국가간체계를 ‘갱신’할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동아시아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생산과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는 지금 동아시아를 새로운 축적순환이 시작되는 장소로 만드는 데 동참함으로써 근대자본주의체계를 되살려낼지, 아니면 다양한 사회운동을 통해 기존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꿈꾸는 대안세계화에 동참할지의 기로에 서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세계체계 분석으로 들여다본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체계 전체의 변화가 전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이행의 시대’에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단초를 던져준 셈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08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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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otoven > 실전처럼 풀어보는 지난번 능력시험 문제지..
일본어능력시험 1, 2급 (기출문제집1 + TAPE 2)
국제교류기금 엮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12월에 일본어능력시험을 보게될 사람이라면 11월정도에 전년도나 전전년도의 문제집을 구해서 모의시험을 치뤄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시험의 패턴도 궁금하겠지만, 시험의 정확한 수준, 그리고 시험방법과 요령에 대해서도 감이 안 올 것이다. 이 문제집은 2년간의 문제집이 그대로 테이프와 함께 수록되어 있고 답안지도 포함되어있어 실전처럼 연습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교재이다. 그리고 문법노트라는것이 별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년동안 출제되었던 단어들을 정리해주고 이 문제집 안에서의 표현과 해석들을 보기 쉽게 풀어주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체독해 해설과 문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것들이 더 세밀했다면 금상첨화였을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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