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 의식 역사도서관 2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조한욱 옮김 / 길(도서출판)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밤의 전투>가 출간되었다.

신문화사 계열의 역사서를 주로 번역 소개해온 한국교원대학의 조한욱 교수가 옮긴이. 지금껏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글은 단행본 하나(<치즈와 구더기>(문학과지성사))와 <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숲)에 수록된 몇 편의 논문이 고작이었다.

새로운 역사서술의 흐름을 규정지을 때 흔히 우리는 "미시문화사"라는 용어를 쓴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의 미시사와 영미의 신문화사라는 두 역사학 이론에서 공통되는 부분을 표현한 말이다. 공통되는 부분,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학문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역사학계에서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의 교집합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같은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범용한 독서인이란 전제 하에 말하자면, 이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미시사가 얼마나 엄밀한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가를 살펴보려면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글을 읽는 것이 최상이다. 미시사와 신문화사 사이의 접점인 "아래부터의 역사학"이란 모토는 사실 그 둘만의 공통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포괄적이고 성근 개념이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계량, 수치, 통계에 집중했던 역사학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면서도 역사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런 장점을 지닌 책이 바로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종교학, 인류학, 민속학, 정신분석학 등 분과학문의 벽을 넘나드는 서술의 묘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이 책의 서술을 보면서 바흐친의 민중적 세계관이 생각났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에 등장하는 잡종적 인간들(예를 들면, "타오르는 푸른나무"의 주인공인 성전환자)이 떠올랐다. 민중적 세계에 대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견해는 서구역사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질서정연한 고등종교인 가톨릭(정통 그리스도교)이 민중의 토착적 세계를 어떻게 잠식해 들어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 바로 <밤의 전투>다. 우리 발밑 깊숙한 곳에는 오래전에 용솟음쳤던 물길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비학적인 세계와 이단적인 세계의 역사가 사멸하는 순간 근대성의 미약한 첫울음이 들리기 시작했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아직 이 세계의 마법은 풀리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리 가난한 이들은 믿음을 지푸라기처럼 붙잡고 산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주술과 마법의 세계에 살아가면서, 생산성과 풍요를 갈구하던 민중세계의 풍속을 기묘한 기하학적 무늬의 만화경처럼 펼쳐내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솜씨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다.

1989년 대작 <밤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있는 긴즈부르그의 관심사, 마법과 주술사, 마녀들의 집회 등 민간신앙에서 유럽문화의 본질과 문명의 본질을 캐내는 뿌리로의 탐색, 그 드넓은 세계로 나가는 첫번째 관문인 셈.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짚고넘어갈 것 한 가지.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나는 외래어인명표기법의 용례에 준해 '긴'이 아닌 '진'으로 알고 있었는데, 옮긴이인 조한욱 선생께서 직접 답변을 주셨다. "카를로 긴즈부르그!"  이게 맞다는 말씀을. 옮긴이 조한욱 선생께서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한 바 있다고 하신다. (저자 긴즈부르그가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는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외람되게도 선생의 이탈리아어 실력까지 의구심을 가졌으니 무식이 지나치면 용기가 아닌 만용이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한 수 배웠으니, 그럼 다시 쓰자. 국내에 출판된 카를로 '진즈부르그'란 표기는 실제 불려지는 것과는 상관없는 국내용 이름이라고. 프레드릭 제임슨(프레드릭 제머슨)이 국내에서만 통용되듯이. 하지만 당사자가 들으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매너있고 바람직해 보일 것. 그러니 "카를로 긴즈부르그"라 정확히 부르자. 그리고 이 책은 오랫동안(10여 년) 카를로 긴즈부르그 문하에서 공부한 긴즈부르그 제자인 이경룡이란 분의 눈과 손을 통하는 검토 감수과정을 세밀히 거쳤다고 한다.

역사학 전공자가 착오를 줄이기 위해 겸허히 자신을 내어놓은 모범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학술서에서 감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웬만한 사람은 잘 알고 있을 테니.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전후과정이 얼마나 지난하던가. 옮긴이부터 편집자까지 모든 이의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으니 그걸 잊지 말자.

각설하고,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그리 어렵지 않은 흥미진진한 세계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니 겁먹지 말고 펼쳐읽자. 책을 펼쳐 마법과 주술이 생생히 살아 있는 중세 이탈리아의 농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은 목요일. 어두운 들판에 나아가 회향풀을 손에 든 베난단티들이 수수를 든 말란단티들과 치열한 밤의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베난단티들이 이겨야 이 겨울의 경제불황이 끝날지 모른다. 베난단티의 승리가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기에.

번역본의 표지디자인이나 본문의 레이아웃 등 공들여 책을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명저에 걸맞게 성정을 들여 책을 꾸민 길출판사의 노력에도 격려의 박수를. 길출판사에서 준비중인 다른 인문학 명저들이 속속 출간되길 기대해본다. 특히 벤야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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