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원미동 시인 > 답사만을 위한 책은 아닙니다.
경주 답사여행의 길잡이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 돌베개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경주를 좋아합니다. 시가지 자체는 어수선하고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시가지를 벗어나면 느껴지는 분위기는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가을 단풍이 한창일 무렵 아침 햇살을 안고 추령고개를 넘어가 보셨는지요? 혹은 5월말 경주의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 보셨는지요? 이런 체험을 가진 분이라면 아마도 그 순간 당신이 전생에 경주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석양에 물든 인적 없는 감은사지에서 누군가와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이런 체험을 가진 분이라면 아마도 그 순간 당신과 그 사람의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비롯된 유구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저는 경주를 여행할 때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답사 여행의 길잡이”로서 이 책을 가지고 다니리라는 실용적인 이유에서보다는 다만 이 책이 경주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이 책을 단순한 “답사 여행의 길잡이”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은 제가 이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은 “답사 여행의 길잡이”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서 출판된 유명한 여행 안내서 시리즈에 못지않게 유용한 정보들을 알차게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답사 여행의 길잡이”로만 한정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이 책이 주는 인상은 여행 정보 이상의 것입니다.

우선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인문학의 아취가 느껴집니다. 여타의 여행 안내서라면 분명히 다루지 못했을 학구적인(?) 글들을 읽으며 이 책만이 선사할 수 있는 우아한 교양을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책에는 경주에 대한 엮은이(들?)의 오랜 애정이 한 줄 한 줄의 문장마다 스며있습니다.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도 좋기는 하지만 이 책의 경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던 땀냄새와 우직한 애정과 기나긴 시간의 흔적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느껴집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도판이나 현란한 감탄사는 없지만 수수하고 성실할 뿐더러 영민함과 따뜻한 마음까지 갖춘 책이라고 해도 이 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과찬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워낙 멋대로 돌아다니는 편이라 제가 경주에 갔을 때 이 책이 제공하는 모범적인 정보들에 의지했던 바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책의 실용성에 의지했던 사례를 꼽으라면 좀 엉뚱하게도 원조 황남빵집의 위치를 이 책에서 찾아보고 갔던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 비추어 “황남빵집 찾아가서 황남빵 사먹는 법 200% 활용하기”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황남빵집은 저녁 무렵에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가신다면 차를 타기보다는 걸어가는 편이 당신이 경주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황남빵집이 있는 골목까지 걸어가셔서 주위의 여러 황남빵집 중 어느 집이 과연 원조일지 알아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무사히 원조집을 찾아 들어가셨다면 빵집 구경도 하시고 당신의 예상보다는 비쌀 빵값에 불평도 해보시길 바랍니다. 황남빵을 한 봉지 사서 나온 다음 석양을 안고 대릉원으로 천천히 걸어 가십시오. 어지간한 건물 보다 큰 무덤들 사이 사이의 잔디밭을 걸어도 좋고 무덤을 등반(?)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신 길이라면 주위를 어슬렁 거리고 있을 동네 건달들이나 교복 치마를 걷어올린 깻잎 머리 소녀들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해서 찍어두면 또한 좋은 기념이 되겠지요? 그리고 무덤 위든 무덤 옆이든 원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황남빵을 한 입 드셔보세요. 천년의 고도위로 달이 뜨고 별도 뜰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삶이 지금의 이 생에만 걸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겨 기억나지 않는 당신의 전생을 더듬어보려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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