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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북
귄터 아멘트 지음, 이용숙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섹스북’ 선명한 붉은 책의 제목에 친구 한 명은 연신 킬킬댄다. 아무리 ‘섹스북’ 앞에 ‘사회학 박사가 쓴’이라는 전제가 붙어있더라도 노골적이긴 노골적인가 보다. 하는 수 없이 이 책은 현재 누런 소포용지에 정체를 알 수 없게끔 포장된 상태이다. 이것은 우리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성 표현의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한정된 성교육을 받아왔으며, 성적인 표현을 억누르고 욕구를 오로지 참도록 교육 받아왔는지. 이 책은 기존의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장이라도 내는 듯이 보인다.
일단 이 책의 배후를 좀 파헤쳐보자. 귄터 아멘트라는 사회학자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독일에 ‘성상담연구소’라는 정체불명의 기관을 설립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독일 현지에서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문제의 이 책을 발간했다. 여기에서 센세이션이라 함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센세이션이 아니다. 센세이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흔히 대중이 보이는 어떤 현상에 대한 역반응이다. 즉, 너무 무리하게 시대를 앞서거나 기존사회의 윤리규범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사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도 흔쾌히 수용되어 널리 거론되는 센세이션이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당시 독일 언론들은 이 책에 대해 극찬하였고, “성교육 지침서가 변변치 못한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까지 평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이라는 사회와 외국이라는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책에는 상당부분의 사진이 ‘가위질’되어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여성과 남성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된 컷은 모조리 편집자의 주(住)로 대치되어 있다.
책으로 들어가보자. 목차(Inhalt=content)가 안 보인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혹시 목차가 있으면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을 염려가 있다는, 그래서 목차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는 핑계 비슷한 설명을 달아놓았다. 그만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빼먹을 부분 없이 알차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내부에서의 화자는 모두 세 명이다. 울리케는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으로 추정한다. 카이 우베라는 소년은 사춘기를 막 거치고 있는 남자아이이다. 에이선생은 토론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일종의 사회자이다. 이들은 모두 모여 성이라는 주제를 두고 자유분방하게 토론한다. 자위, 임신중절, 동성애……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런 식의 소주제에 대해 이들 셋은 때론 대립하고 때론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제 이 책에 대한 대략의 사견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책의 내용 자체는 그다지 놀랍고 경이로울 것은 없다. 다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들도 신문에서든 잡지에서든 한번쯤 훑어보면서 생각해봤을 문제들이다. 핵심이 되는 성지식 또한 한국에서 교육받은 이답게 공공교육이 아닌, 또 다른 방법으로 음지에서 얻어서 대략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그토록 칭송되어지고 호평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시도’이다. 지금까지 성에 대해 적나라하게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따금 문학작품 같은 것을 통한 지면에서였다.
이 책은 적나라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읽는 사람에게 무언가 한번쯤 성에 대해 되짚어 볼만한 계기를 만들어 주는, 사회학자에 의한 최초의 성에 대한 지식서인 것이다. 그리고 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도 언급되어야 한다. 시류에 역습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용하며 ‘에이선생’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중간자적 입장을 잃지 않고 객관적인 글을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모든 인류가 잊고 있는 테마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외국의 학생들이 읽는다면 잘 정돈된 한 권의 ‘성교육 지침서’일테지만, 올챙이 모양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을 비디오로 보며 성교육을 받아온 한국의 학생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신기하고 참신한, 그러나 외설적이지 않은 성개론서쯤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