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와 서구 - 에덴에서 제국으로
이종찬 지음 / 새물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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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2장과 3장에 나타난 주장과 논거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구적 시각에서 형성된 '열대성'을 이 책의 주요 개념으로 삼으면서, 2장에서 "식물지리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열대의 인식"을 다루며, 3장에서 "낭만주의적 인식을 통한 열대성 창안"을 거론한다. 상당한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가 이 책에 들인 공은 컸음을 알 수 있지만, 결과는 그에 미치지 못하며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 전체적으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특별히 관계 없거나 무용한 인용을 과시적으로 집어넣어 글의 흐름을 스스로 방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경도되어 인용문을 본래의 맥락과 달리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때로는 사실과 다른 서술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이 점을 경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열대성의 개념적 근원을 다루면서 유럽의 '나무 숭배'와 '식물적 상상력'에 사로 잡힌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맥락의 진술을 견강부회하거나 잘못된 논거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아래의 서술을 들 수 있다.


로랭은 <모세와 타오르는 덤불숲의 풍경>에서 떡갈나무를 통해 다윗과 모세를, 버드나무를 통해 야곱과 라반 등을 묘사하고 있다. 유럽의 여행자들은 로랭이 죽은 지 거의 한 세기가 다 되었을 때에 로랭이 떡갈나무와 버드나무에 의미를 부여한 방식대로 자신이 본 풍경들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88쪽)


위 문장에서 저자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인용하고 있다(붉은 글씨). 하지만 인용한 곰브리치의 진술은 저자가 주장하는 '나무 숭배'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곰브리치는 17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이 로랭의 그림을 통해 '그림같은'(picturesque) 풍경을 발견하고 이를 영국의 스타우어헤드 정원처럼 현실에 재구성했다는 뜻으로 서술했다.


유럽인의 '식물적 상상력'에 경도된 저자는 다음의 서술에서 잘못된 논거를 제시한다.


괴테의 식물형태학은 18세기 후반 독일 낭만주의의 사상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낭만주의는 식물에 관한 기독교적 의미를 갖고 있는 중세의 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식물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피어났다고 알려진 수난초(Passionsblume)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확실히 1760년대에서 1830년대 사이에 소위 '질풍노도'를 주도하였던 하만, 슐레겔 형제, 실러, 노발리스, 셸링, 헤르더, 레싱, 괴테 등에 의해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103-104쪽)


매끄럽지 못한 인용문의 나열 속에서 저자는 '수난초'와 관련하여 하이네의 『낭만파』에서 이를 인용하고 있다(붉은 글씨). 저자는 독일 낭만주의가 "식물에 관한 기독교적 의미를 갖고 있는 중세의 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하이네는 낭만파』에서 1830년대 가톨릭에 기반한 반동적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된 독일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를 중세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에서 싹튼 수난의 꽃"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유까지 동원하여 열대에 대한 '식물적 상상력'이라는 주장의 사실적인 근거로 왜곡하며 "수난초에 대한 독일 중세의 시에 기원을 두고 있는 낭만주의"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132쪽).


한편 저자는 괴테를 일관되게 낭만주의자로 서술하면서 그가 "셸링의 형태적 미학을 받아들여 원형 식물에 몰입했다(104쪽)"고 진술하는데, 저자가 밝혔듯이 "원형 식물"은 셸링이 자연철학과 예술철학에 대한 저작을 쓰기 훨씬 이전에(1787년) 이미 괴테에게 나타나는 개념이다. 오히려 괴테는 스피노자가 말한 세 가지 인식(감각지, 이성지, 직관지) 가운데 직관지(Scientia intuitiva, 에티카 제2부, 정리40)에서 원형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구체적이며 직관적인 자연관찰을 통해 원형상(Urphänomen)을 발견하고자 한 괴테의 면모는, 정신과 자연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낭만주의자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괴테를 낭만주의 박물학자로 일관시키면서 "낭만주의 사상가들의 이런 식물적 상상력은 문학적, 미술적 상상력으로 연결되어 확대되어 갔다(104쪽)"고 한 주장은 공허하게 들린다.


P.S. 참고로 72쪽에 나오는 칸트의 "물리지리학"이라는 용어는 "자연지리학"(physische Geographie)으로 고쳐 써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지식을 정리할 때에는 논리적 분류와 자연적 분류 가운데 어느 한쪽의 방법이 취해진다. 개념들에 의한 분류가 논리적 분류이며, 시간과 공간에 의한 분류가 자연적 분류이다. … 후자의 분류에 의해서 자연의 자리적 기술이 얻어진다." (『칸트사전』, <자연지리학>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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