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에 생각보다 대단하고 장황한 수식어갸 많이 붙어있다.

좋아했던 작품이다.

꽤나 오래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서문을 더듬으니 내가 읽었던 것은 25주년 판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표지를 장식한 루오 특유의 선굵은 예수 그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80~90년대의 이문열은 안 읽을 수는 있어도 모를 수는 없는 작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오래동안 그는 나왔다 하면 주목받는 작가였다.

한창 독서를 열심히 하던 시절에는 한달 건너 한달 그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20대에게 물으니 이문열을 잘 모른다고 한다.

하긴 내가 물어본 상대가 독서와 인연이 먼 쪽이라 대상이 틀렸다.

누구를 아는가 물으니 유명한 웹툰 작가를 댄다.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 확실하다

 

이 책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줄은 알았다.

하지만 300만부나 팔린 초 베스트셀러 인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그의 다른 작품보다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다.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건 신과 인간과 종교에 대한 주제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관심이 있다는 방증일거라 본다.

작가의 말마따나 신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중 하나이다.

더 이상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의 후기에 더 맞는 제목은 '왜 요섭을 죽였나'가 될 것이다. 너무 대놓고 결론이라 살짝 피해서 '누가 요섭을 죽였나'로 정했다.

대구 동부서의 남경사는 변두리 지역에서 발견된 사체를 조사한다. 다행히 제보에 따라 근처 기도원에서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원미상의 30대 남자의 이름은 민요섭. 한때 신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결국은 퇴학을 당한 알 수 없는 인물. 그의 신학교 동기였다는 전도사는 기도원에서 머문 짧은 기간을 제외한 그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남경사는 수사를 위해 그가 남긴 글을 읽으며 그를 죽인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여기서 작품은 남경사의 수사과정과 요섭이 남긴 글을 액자소설로 배치한다. 남경사가 추적해나가는 요섭과 그가 탐구했던 인물 아하스 페르츠는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닮은 인생역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아들'을 듣고 기독교 신자는 예수를 떠올리고, 불교 신자는 붓다를 떠올린단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민요섭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은 예수가 아닌 아하스 페르츠야 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라 믿고 그의 인생과 종교를 탐구하고 닮고자 노력한다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이 그토록 자비롭고 사랑에 넘친 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애매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아담은 감히 선악과를 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원죄의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자유가 꼭 주어져야 했다면, 금지규범을 만들지 않아야 했지요. 그랬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땄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우리의 나약한 의지 위에 얹어놓고, 선택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려 합니다.  110페이지

신학교의 요섭이 학교측과 대립의 각을 세우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듯이 누구보다 교리를 잘 배우던 아하스 페르츠도 신관이었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집을 나와서 이교도의 땅을 방황한다. 교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며 목사와 반목하고 장로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교회를 떠난 요섭은 부산에서 그의 추종자를 만난다. 하숙집 주인의 외동아들이자 조숙한 고등학생 조동팔이다. 민요섭은 맹목적 추종을 하는 조동팔이 부담스럽지만 조동팔은 요섭과 행적을 같이 한다. 하지만 죽기 한 달전 요섭은 자신이 떠났던 종교로 다시 찾아왔고 그 곁에는 조동팔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교회 계통이 아니던가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전혀 달라 보였어요. 지금 기억나는 것으로도 그들이 자주 말하던 것 가운데 이런 게 있었거든요. '너희는 나를 위해 경배하지 말라.나를 위해 제단을 쌓지 말며,나를 위해 의식과 예물을 바치느라 너희 귀장한 재물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라. 먼저 스스로를 구하라.''너희는 이웃을 사랑하라. 내가 기뻐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도 너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지나치게 많이 가짐을 구하지 말라.많이 가짐이 악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이 가난해지는 게 악이기 때문이다.'하도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기억하게된 구절들인데, 비슷하지만 교회 계통은 아니었어요.

  227페이지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다."

........................

"그렇다면 알면서도 민중들을 속였단 말씀입니까? 이 성스럽고 장엄한 축제가 사실은 커다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저들도 알고 있다."

"저들도 알고 있다고요?"

앞서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하는 대답에 아하스 페르츠가 더욱 놀라 물었다. 그가 잠깐 아하스 페르츠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특별히 무엇을 털어놓는다는 표정도 짓자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오히려 우리에게 속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축복히면서도 재앙이기도 한 나일의 범람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왔다. 아주 옛날에는 누우나 아피의 권능에 위해서였으며, 한때는 세라피스의 축복이었다. 지금은 이시스의 눈물로 보고 있지만,또 어떤 사람들은 넵티스와 오시리스의 밀통에서 흐른 정수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득한 상류 첫째 폭포 위의 우기를 알지 못했던 시절에도 그러한 설명을 참으로 믿었던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다만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래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

159 페이지 

앞의 인용구가 요섭의 행적이라면 뒤의 인용구는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에는 무수히 많은 중동의 신들이 나온다. 이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통일된 중동에는 이렇게나 많은 종교와 신들이 인간의 숭배를 받다가 잊혀지고 배척되어 졌다.

책을 읽는 독자를 위해 추리적 요소를 살짝 도입해서 쉽게 접근하게 (작가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당의를 씌웠지만 종교라는 주제는 쉽지가 않다.

종교를 믿으면서 아니면 믿기 전에 또는 종교를 버리면서 우리는 무수한 질문과 변명과 대답을 주고 받는다.

이 책의 곳곳에서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던져보았던 질문들 아니면 누군가 나에게 했던 질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질문하고 대답하지만 의문이 풀리지는 않는다.

신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라고 했던가?

신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